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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04. 2024

그녀의 도서관 13

단편소설


13.


도서관의 벽과 도서관 안의 책장과 책상 그리고 의자를 쓰다듬었다. 도서관의 색채가 조금 옅어졌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그렇게 눈의 띄지 않게 서서히 빛을 잃어 간다. 생명체든 아니든 빛을 내는 순간이 있다. 그 빛이 여러 번 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빛이 오래 지속되는 건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도 날이 흐리다. 날이 흐리고 태양이 숨어 버리면 도서관의 숨결은 섬세해졌다. 사서는 통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도서관은 폐관될 날이 얼마 남자 않았고 키키는 여전히 행망불명이다. 키키는 마치 이 세계가 싫어서 자신의 세계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며칠 동안 키키가 갈 만한 곳(라고 해봐야 그저 추측일 뿐이다)과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키키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찾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키키를 아는 사람은 미노그바의 사람들뿐이었다. 손님으로 온 남자들이 있을 텐데 남자들 역시 키키를 전부 모른다고 했다. 키키는 정말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그 세계로 다시 가버린 것 같았다.


나는 도서관에 나와서 도서관이 폐관되기 전까지 앉아서 그녀의 방을 보며 그녀의 짙은 냄새를 기억했다.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사서와 통이에게 인사를 하고 키키를 찾아다녔다.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흔적은 어딘가에서 칼로 잘라 놓은 것처럼 끊어졌다. 그 뒤로는 그저 추측으로 키키를 찾아다녔다. 마지막은 항상 미노그바에서 미호에게 키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버드와이즈를 마시며 키키가 좋아한 그림을 한참 보다가 왔다.



조와 중학교를 다닐 때 토요일 방과 후에 목욕탕에 자주 갔다. 조는 목욕을 하다가 목욕탕의 하수구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서 거길 바라보곤 했다. 사람들의 몸에서 나온 때가 한 번에 빠져나가지 못하고 하수구 입구에 홍수 뒤 떠내려온 쓰레기 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때라는 게 우리 몸에서 빠져나와서 저렇게 더러워지는 걸까. 우리 몸에 붙어 있을 때부터 더러운 걸까?] 라며 조는 때가 밀려 있는 하수구 입구에 물을 뿌렸다. 하지만 흩어졌다가 다시 더러운 형태를 유지하며 서서히 밀려들었다.

[우리는 죽으면 저렇게 찌꺼기가 되는 거야] 조는 발가벗고 쪼그리고 앉아 하수구에 쌓인 물을 찔끔찔끔 뿌려가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조는 목욕탕에 와서 때를 미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차피 밀 때마다 나오는 때거든. 밀지 않으면 나오지도 않아. 결국 때를 미는 건 피부를 벗겨내는 거야]라고 말하던 조는 등은 열심히 밀었다. 조의 등에서 언제부터 능소화가 피었는지 모르겠지만 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일까.



키키는 능소화를 좋아한다. 미호의 말을 빌리면 키키는 커플 인 배드 속 연인이 좋아하는 꽃이 능소화라는 말을 했다. 오늘도 미노그바에 가서 능소화 그림을 보았다. 미호는 칼스버그를 내주었다. 맥주를 홀짝이며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 속에 어쩌면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능소화 뒤로 뭉개진 배경은 아파트 단지처럼 보였다. 실제 장소인지 아니면 그저 그림을 위한 배경인지 확실하지 않다. 자동차들이 저 멀리서 와서 여기를 스쳐 다시 반대쪽으로 사라지는 소리들이 들렸다. 소리는 불안하게 들렸다.

[죄송해요]라고 미호가 말했다. 그러면서 훌쩍였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게 저를 비참하게 만들어요. 키키 걔를 생각하면 느닷없이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분명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에요] 미호는 결국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작은 어깨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울지 말라고 말하려다 나는 그대로 두었다. 바에는 이른 시간이라 아직 손님이 없었고 미호의 눈물로 시작해서 일하는 여성들이 하나둘씩 눈물을 흘렸다.


왜 하필 능소화일까. 나는 키키가 걸어 놓은 능소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단순한 문장이어야 한다. 복잡하면 키키는 문어처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숨어 버릴지도 모른다. 누군가 능소화는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주렁주렁 열리는 꽃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했다. 능소화는 뜨거운 한 계절의 시간과 시간 사이에 만개한다. 능소화는 가장 활활 타오르는 8월에 활짝 핀다. 8월은 태양의 계절이자 저주의 계절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열을 뿜어내지만 태풍이 여러 번 휘몰아치고, 장마가 이어지고 또다시 태양이 이글이글 열기를 발포한다. 그런 하늘을 업신여기듯 피어나는 꽃이 능소화다.


모든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 아니라 가장 좋지 않을 때 주황색으로 단장을 하고 주렁주렁 열린다. 키키를 닮았다. 키키는 능소화처럼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조는 능소화를 등에서 피우고 있다. 조의 등에서 피어나는 능소화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이 계절에 아일랜드 북부 킬키뉴어의 가장 스산한 마을의 수녀원에서 피어나려고 한다. 분명 이 계절에 조의 등에서 피어나는 능소화는 짙은 냄새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능소화는 저물 때 벚꽃처럼 잎 하나하나 떨어지지 않는다. 통째로 바닥에 툭 떨어진다. 어쩌면 키키도 그렇게 끝장나는 게 어울리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조 역시 그렇다. 나는 그 중간에 거쳐 있는 존재일지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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