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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05. 2024

그녀의 도서관 14

단편소설


14.


처음으로 돌아가자. 단순한 문장을 생각하자. 도서관의 냄새에 귀를 기울이자. 처음에 읽었던 [벽 속의 또 다른 벽]을 펼쳤다. 벽을 깨고 싶어 하는 또 다른 벽의 이야기. 또 다른 벽은 키키다. 초현실이며, 극사실이며, 더불어 은유가 덮고 있는 이야기. 벽이 벽을 부수고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 방어막의 벽이 아니라 보호막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기능적인 벽이 되고 싶어. 키키가 바라는 그 울타리 같은 벽이다. 도서관 창으로 보이는 옆 건물의 저 딱딱한 벽이 아니라.


키키가 좋아한 [마녀배달부 키키]를 봤다. 키키 역시 마법 마을의 벽을 넘어 세상으로 나갔다. 비록 비바람과 사람들의 편견에 부딪혀 힘들지만 견디고 이겨내서 성장을 한다. 성장에는 고통이 따른다. 지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키키는 알고 있었고 받아들였다. 나의 품에 안긴 첫 인형과 떨어지는 순간이 내가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을 알아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오후 5시가 되었다. 나는 키키가 없는 키키의 방을 보았다.

텅 빈 방.

키키가 속옷을 입고 거울을 보는 장면을 떠올렸다. 날이 지날수록 점점 그 기억이 흐려지는 걸 막으려고 매일 매 시간 키키가 거울을 보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기억은 기록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나는 기록보다 기억을 했다. 키키의 뒷모습, 키키의 얼굴, 키키의 속옷. 키키에 관한 것을 자세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고자 하는 부분을 또렷하게 기억을 할 수 있다. 그게 장점이며 단점이다. 사서와 통이에게 인사를 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도서관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본 도서관은 형태마저 조금 쪼그라든 것 같았다. 이제 소멸의 시간이 가까워져 간다. 그전에 키키를 찾고 싶다. 키키를 찾아서 단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조급해지지만 조급하면 안 된다. 조급하면 모든 것이 틀어질 수 있다.


조는 나의 조급함에 대해 언질을 한 적이 있다. 조급하면 앞뒤 상황을 맞출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조급한 사람이 조급함을 버리는 건 힘들지 모르지만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조 역시 아버지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조급했다고 했다. 그러나 조는 훈련을 했다.

[어떤 훈련을 해야 하지?] 나는 조에게 물었다. 그러나 조는 확실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조는 이후 어떤 훈련을 했는지 등에서 능소화가 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나는 늘 조급했다. 불안한 마음이 갈비탕을 먹고 나면 남아 있는 찌꺼기처럼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벽과 벽을 다 가지고 있는 존재일지 모른다. 두 벽은 전부 딱딱하고 어두워서 파괴될 수 없는 호러블 한 것이다.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해 보지도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벽을 더 두껍게 쌓아 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조급함에서 벗어났다고 확신을 했다. 이 세상에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일들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확신했다. 그건 분명히 도서관의 영향이 컸다. 키키 덕분이기도 했다. 이제 곧 사라지는 도서관을 나는 [그녀의 도서관]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녀의 도서관이 폐관될 날이 다가온다. 아직 시간이 좀 있다. 남은 시간 동안 키키를 찾자. 못 찾으면 까지 생각하다가 아니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 저녁에는 미노그바에 들렀다. 미호가 칼스버그를 내주었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라고 미호가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잘 마실게요]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실려 온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이건 필시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과 연관이 있다. 도서관의 짙은 냄새를 알게 된 나에게까지 어떤 타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머, 오늘 목소리가 조금 다르네요]라고 미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그바 안이 조금 추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키키가 걸어 놓은 능소화의 그림이 약간 다르게 보였다. 나는 미호에게 저 그림이 어제와 다른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다. 미호는 마치 심각한 음식을 맛보는 표정으로 그림을 한참 쳐다보더니 모르겠다고 했다.

[그림을 안 좋아해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만약 어제와 그림이 달라졌다면 이상한 일이 잖아요]라고 미호가 말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그림이 달라질 리가 있나.

하지만 그림은 분명히 달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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