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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06. 2024

그녀의 도서관 15

단편소설


15.


능소화를 그린 그림은 초현실 그림이다. 능소화지만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능소화인지 모를 그림이다. 해체주의적인 그림이다. 커플 인 배드처럼 구상화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 지금 보는 능소화는 보자마자 능소화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저 그림이 능소화 그림이라는 걸 알고 봐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분명 어제와 다르다. 능소화는 주렁주렁 열려 있는 그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마 미노그바의 온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온도가 내려가면 능소화의 그림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른다. 키키는 여기보다 조금 추운 곳에 있다. 단순한 문장으로 [키. 키. 는. 이. 곳. 보. 다. 조. 금. 추. 운. 곳. 에. 있. 다] 나는 이렇게 시 노트에 문장을 썼다. 온도가 조금 내려가 있는 곳은 지하다. 분명 지하의 온도는 여기보다 조금 내려가 있다. 내일은 지하를 위주로 키키를 찾자.


집에 소포가 와 있었다. 조에게서 온 소포다. 물론 편지와 함께 같이 왔다. 소포를 열어보니 분말이었다. 조는 자신의 등에 난 능소화로 차를 우려낼 수 있는 분말을 만들었다고 했다. 수녀들이 열심히 연구한 끝에 만든 분말이라고 했다. 이 분말을 물에 타서 마시면 좋은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분말의 냄새가 났다. 아 이 냄새면 벽속의 곰팡이의 냄새까지 없을 것 같았다. 소포에는 또 다른 물품이 들어있었다.


빛의 영역은 시간에 따라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빚은 그 영역이 줄어들다 밤이 되면 빚은 사라지고 만다. 12월 31일로 해가 끝이 나면 1월 1일로 해는 다시 시작한다. 빛이 사라지면 다음 날 빛이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 그러나 다음 날 빛이 뜨지 않는 다면,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우린 하염없이 그 사이를 걷고 있었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 채 빛과 어둠 속을 번갈아가며 그림자가 되어서 걷고 또 걸었다. 우리라 함은 나와 키키였다. 키키의 입에는 치아가 다 있었다. 치아가 다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소리가 치아에 부딪혀 입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때 키키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감촉이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더 이상 빛이 비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어둠 속으로 키키가 사라졌다. 나는 꿈속에서 사라진 키키를 찾으러 어둠 속을 헤집고 다녔다. 어둠이 팔을 할퀴고 얼굴을 할퀴었다. 상처가 났고 어둠 속에서도 붉은 피가 선연하게 드러났다. 붉은 피는 차츰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상처 난 나의 몸 이곳저곳에서 능소화가 피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집 안이 평소보다 서늘했다. 악몽 때문에 땀을 흘리고 식으면서 몸의 열이 방출되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조가 보내준 능소화 분말을 뜨거운 물에 풀었다. 능소화의 향이 집 안에 퍼졌다. 능소화의 냄새가 딱히 어떤 냄새인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제대로 된 설명을 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곤 했다. 능소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조는 힘들어하면서도 나를 위로하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능소화 차 맛은 그런 맛이었다. 차를 마실수록 위로의 맛이 위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흐르는 걸 막지 못했다. 이제 도서관 폐관까지는 사흘이 남았다. 조급함은 금물이지만 조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집 안이 평소보다 서늘했다. 악몽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리고 식으면서 몸의 열이 방출되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조가 보내준 능소화 분말을 뜨거운 물에 풀었다. 능소화의 향이 집 안에 퍼졌다. 능소화의 냄새가 딱히 어떤 냄새인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제대로 된 설명을 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곤 했다. 능소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조는 힘들어하면서도 나를 위로하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능소화 차 맛은 그런 맛이었다. 차를 마실수록 위로의 맛이 위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흐르는 걸 막지 못했다. 이제 도서관 폐관까지는 사흘이 남았다. 조급함은 금물이지만 조급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서와 탕이는 카운터에 있다가 나를 보고 반겨 주었다. 어제 이 모습도 며칠밖에 볼 수 없다. 도서관은 한 없이 초라해 보였다. 도서관에 영향을 받는 나와 키키 역시 초라해 보일 것이다. 사서도 초라함이 묻어 있었다. 탕이만 사서의 보살핌을 잘 받아서 그런지 건강하게 보였다. 사흘 후가 아니라 오늘 폐관해도 누구도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서는 꼬리를 흔드는 통이에게 사료를 주고 있지만 표정에 그늘이 져 있었다. 아마 도서관의 폐관을 가장 슬퍼할 사람은 사서다. 그녀는 세상이 포기하는 길을 계속 걸어가려 한다. 사서는 도서관이 폐관되면 책방을 열 것이라고 했다. 사서는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오르려 한다. 하지만 그게 사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동시에 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사서는 그걸 해낼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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