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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pr 02. 2024

회색도시 3

소설


3.


방은 사방이 하얀색이다. 형광등이나 전등 같은 것도 없는 방 안에는 일정한 조도가 있어서 어둡지 않았다. 손으로 어떤 장치가 있나 더듬어봤다. 아무리 벽면이나 바닥을 찾아봐도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틈새라든가 버튼이나 여타 양각의 무늬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창문도, 나가는 문도 없다는 게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호기심이 좀 더 있었지만 단 몇 분 만에 불안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누군가가 나를 방에서 꺼내주지 않는다면 나는 방에서 그대로 죽을 것이다. 아마도 고통스럽게 죽겠지.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해서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고통은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지만 배고픔과 허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지 못해서 더욱 불안하다.


방 안에 공기가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틈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공기의 흐름도 없고 공기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숨을 쉬고 있다. 배가 고프다거나 목이 마르지도 않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누워 있으면 잠이라도 올 줄 알았지만 전혀 잠은 안 왔다. 도대체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분명 하루는 지났을 것이다.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불어 줬으면 하고 생각했다. 누워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세상은 온통 검은 세상이어야 하지만 밝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보이는 건 비슷했다.


분명 하루가 지났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걸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이틀이 지났는지 하루 반나절이 지났는지 사흘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목시계도 없고 휴대폰도 없다. 나는 옷만 입고 있다. 이상하면서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소변도 마렵지 않고 대변도 나올 기미가 없다. 배라도 고프면 내가 살아있다고 느낄 텐데 전혀 배고프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점점 시간이 흐르니 짜장면의 맛이나 콜라의 상쾌한 맛이 어땠는지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음식의 맛도 기억을 할 수 없고 추억마저 까무룩 했다.


나는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대로 몇 시간이나 있었다. 아니 며칠이나 있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는 죽은 것일까. 아니다 죽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사각형의 방에 있으니 생각이 생각을 볼러 들이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홀로 있다면 불안은 점점 증식했다. 나는 그동안 불안을 떨쳐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감각 중에서 냄새에 관한 감각이 제일 나중에 없어진다는데 냄새를 기억하는 감각이 멀어지는 느낌이다. 내가 현명하다면 이 방에서 적어도 나갈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그러나 나는 완전히 눈앞의 모든 것에 막혀 있었다. 행복보다는 덜 불행한 쪽을 택했다. 행복이란 건 너무나 초현실적이니까. 덜 불행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삶의 목표였다.


하얀 방에 들어와서 느낀 것은 나는 방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을까. 이 방은 기억을 뽑아 먹는다. 점점 더 불안에 두려웠다. 기억이 나는 부분은 너무나 흐리고 알 수 없다. 나에게 가족은 있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가족은 내가 집에서 누군가에게 업혀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 그럴 리 없다. 나는 혼자서 생활했을까. 가족이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누군가에게 업혀 나가는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 할리가 없다. 나는 버림받은 것일까. 나는 버림받아도 되는 그런 인간인 것일까.


타닥타닥 빗소리가 들리고 있다. 비가 내리면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무의식 중에 그 소리를 집중해서 오 분 정도 들었다. 나뭇가지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여러 개의 더 작은 물방울로 쪼개져서 흩어졌다. 매일 다니는 골목의 계단, 계단마다 놓여 있는 이름 모를 화초가 꽂혀 있는 화분들, 우산을 들고 오고 가는 사람들, 사람들의 얼굴은 각각의 표정을 짓고 있다. 사람마다 고유의 표정이 있다. 맑은 날 골목의 계단에서 하늘을 보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다. 밤의 하늘은 별들이 그 자리에 있고 낮에는 태양이 조금씩 천천히 이동을 한다. 도로변의 사거리는 차들이 오고 가고 신호등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 모습이 마치 장난감처럼 정교하게 보인다. 모든 풍경이 매일 지나치는 곳에서 보이는 모습들이다. 새로울 것 없고 가까이 있어서 몰랐지만 매일 볼 수 있는 그런 사소한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이 들었다. 늘 곁에 있어서 몰랐던 것들, 눈여겨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


나는 하얀 방에 고립되어서 극도의 공포의 불안을 견디는 훈련을 했다. 이 완전무결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공포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껴야 했지만 훈련 덕분에 아무렇지 않았다. 회색도시는 나를 공포에 몰아넣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회색도시에서는 그런 것이 가능하다. 뭐든 가능하니까. 이곳에서는 감정만 가지지 않으면 된다. 사랑만 하지 않으면 된다. 마치 우주의 한 공간에 떠 있는 것 같은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움직이고 있다.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지만 실은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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