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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해무의 저편에서 마른번개가 비 사이를 뚫고 크게 내리쳤다. 순간 먼 곳에서 하늘이 팽창하고 오므라들었다가 공기층이 갈라지고 시간이 구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딱딱하고 공룡의 등지느러미를 뚫고 그 속에 살고 있던 화석벌레가 뛰어 올라오듯 갈라지는 소리였다. 소리는 퀴퀴하고 어둡고 죽은 소리 같았다. 머리가 없는 사람들의 소리가, 무서운 이념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누린내는 땅에서 기어 올라와 서로를 응결시키려 하고 있었다
-들리는가 그것이 다가오는 소리다 이제 아주 가까이까지 와버려다-
“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글쎄 나로서는 확실하게 그 방법을 안다고 할 수가 업다-
장군이는 커피 한 모금 마실 정도의 시간을 두었다.
-네 속의 그 어두운 도트는 저 거대한 암흑의 독보성과 관련이 있다 도트가 어떤 식으로 확장이 되는가에 따라서 암흑의 그것에 잠식되거나 암흑을 누르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지금은 어둠의 도트가 멈춰있지만 영원히 누르고 있을 수는 업다 시간이 업다-
흠.
오늘저녁 마동은 조깅을 하지 않았다. 비가 와서 달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비가 쏟아지는 여름에는 비를 얼굴에 맞으며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달리면서 떨어지는 비를 사선으로 맞으면 비가 정당한 자연의 시원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여름에 쏟아지는 비는 마동의 감정을 잘 숨겨주었고 동시에 흐르는 땀도 씻어주었다.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조깅코스에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비가 쏟아지는 여름밤에는 악착같이 밖으로 나갔다. 눈썹 위에 비가 떨어지는 상쾌한 느낌을 좋아했다. 빗물이 속눈썹 위에 맺혀있을 때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기분도 운치 있었다. 비가 쏟아질 때 달리는 맛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마동은 그 맛을 잘 알고 있었다. 싫증 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완고하게 반복적으로 달리는 행위가 사람을 싫증 나지 않게 했다.
그러나 마동은 이제 조깅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앞으로 조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마동은 그동안 조깅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결국 생각은 아무런 해답에 도달하지 못했다. 긴 시간 달려온 조깅에 관하여 떠올렸지만 마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총체적 고독을 끌어안고 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마동은 이제 하나씩 정리를 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죽음에 대해서 훈련을 쌓아왔다. 죽음이란 삶의 반대적 관념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이자 그 부분으로 녹록히 녹아 흘러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고 인식하고 훈련을 했다. 질주하지 못하고 내 속에서 멈춰있는 어둠의 도트를 그대로 멈추게 하는 방법은 이제 딱 하나뿐이다. 훈련해 온 대로 실행하면 어둠의 도트는 사라지게 된다. 대 혼란도 멈출 수 있고 장군이도 인간세계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뇌수독룡도 가둬둘 수 있고 해무와 함께 저 먼 곳에서 다가오는 무서운 그 무엇인가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한 부분도 눈을 뜨고 있을 때 이야기다. 눈이 감기고 뇌가 기능을 멈추고 폐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고 심장이 멈춰버리는 순간 아무런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동안 나를 소모하고 마모시키며 살아왔다. 축척하거나 집적은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후회나 자의식 따위는 일지 않았다. 그것이 죽음을 잘 맞이하는 나만의 방법이고 내 책임을 다하는 삶인 줄 알았다. (마동은 거실에서 창밖의 하늘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는개를 만나고 난 이후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져 버렸다. 그동안 여자들과 몇 번의 짧은 만남을 가졌고 연상의 여자와 동거도 했지만 간절함은 들지 않았다. 간절함을 내 마음속에서 힘이 좋은 누군가에 의해 몽땅 뽑혔다.
하지만 는개는 달랐다. 그녀는 부드러웠고 나에 대해서 믿음의 유보를 지니고 있었다. 대체로 굳어있고 딱딱한 나와는 다른 그녀였다. 는개는 아픔을 견뎌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시간의 통로를 거쳐 나를 찾아왔다. 내 마음속에 아주 미약하게 남아있는 연약하고 작은 부분을 그녀의 부드러움이 들어와 가득 채웠다. 그녀의 앞에서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창밖의 빛이 커튼에 가려져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그녀가 커튼을 걷고 나는 일어나서 그녀의 등을 끌어안고 그녀의 목에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현실에 와닿자 나는 또 눈물이 나오려 했다. 내가 사라져 버린 다해도 울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피정도가 안타까워할까. 분홍간호사와 의사가 안타까워해줄까. 장군이가 안타깝다고 할까. 는개가 내 사진을 조금 어루만져 주지 않을까. 그동안 어떤 누구도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거나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괜찮다고 잘 훈련해 왔다. 그렇게 하나씩 나를 소모해 가며 그동안 잘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정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상 달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무의식이 만들어놓은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더 이상 는개의 작은 몸을 안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슬프다고 느끼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슬퍼서 울어 본 적은 언제였던가.
내 속의 눈물은 다 말라서 내 몸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쩍쩍 갈라지는 논두렁의 모습이 나의 본모습이었다. 그런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은 끊이지 않고 눈에서 흘러내려와 볼을 타고 밑으로, 밑으로 떨어졌다. 바다 깊은 곳의 모래알처럼 내 마음은 깊이 가라앉아서 이제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는 슬픔으로 나를 짓누른다. 는개가 보고 싶었다. 그녀를 안고 싶었다. 마지막이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