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
지금은 인간관계가 협소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내심 그 아이들 덕분에 어린 시절의 잊고 지냈던 기억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볼 수 있었다. 그중 한 녀석은 쌍둥이의 아빠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 가난의 칼날이 어린 우리들에게 다가와도 우리는 어렸기에 그것이 가난인지. 가난 때문에 불편한지 인지하지 못했다. 친구들도 나도 비슷한 처지였고 가난으로 놀림을 받거나 손가락질은 받지 않았다.
섭이는 무녀독남으로 단칸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주인집 마루에 붙어있는 단칸방에서 잠을 자다가 어떤 소리에 잠을 깨고 부스스 일어나면 섭이 엄마가 좀 아프다는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고, 어쩌다가 주인집 마당에서 키우던 큰 개들 중 한 마리를 잡는 날이면 섭이는 친구들과 벽 주위에 모여들어 개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렸던 섭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오늘 저녁에는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기쁨에 사로잡히곤 했다. 동네에서 무섭게 짖어대는 큰 개들은 작은 개들과 달리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죽음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서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 속에서 섭이 부모님이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섭이 성적이 초등학교에서 우수했기 때문이다. 5학년 2학기 때 섭이는 모든 과목이 96점을 넘었으며 전부 ‘수’였다. 하지만 섭이가 내내 우수했던 것은 아니었다. 성적이 우수하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섭이가 저학년이었을 때는 공부를 못했다. 그것 때문에 부모님의 걱정이 많았다. 공부라도 잘해야 나중에 우리처럼 이렇게 가난하게 살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섭이도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4학년 때 독한 담임 선생님을 만난 탓에 섭이는 매일매일, 방학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이다시피 나머지 공부를 했다.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분위기가 강했다.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경멸의 눈빛을 받아야 하는, 그런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방과 후에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전부 창가에 앉힌 다음 공부를 시켰다. 아이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오로지 공부만 할 수 있게 하는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흐름이 있어서 창가에서 고개를 들어서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나머지 공부를 하지 않은 아이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나머지 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들도 다음 학년에서 나머지 공부를 할 수 있었음에도, 현재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을 깔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룰에 따라 교실 속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섭이에게 나머지 공부를 가르쳤던 4학년 담임선생님은 감시만 하던 다른 교실의 선생님과는 달리 아이들 각각의 공부를 잡아주었다. 4학년 겨울이 다가오면서 교실의 분위기도 겨울에 어울리게 바뀌었다.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난로에서 담임선생님이 물을 데워서 컵라면에 부어 주었다. 섭이는 가난 덕에 컵라면을 담임선생님에게 얻어먹었다.
담임선생님의 뜨개질의 보조는 늘 섭이가 맡았다. 섭이는 나머지 공부를 하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늦게 집으로 갔다. 열심히 나머지 공부를 했다. 성적이 계속 올랐다. 덕분에 섭이는 5학년에 올라갈 때 성적이 가장 좋았고 졸업할 때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6학년에 올라갔을 때 섭이의 명찰 밑에는 학급위원이라는 권력을 나타내는 다른 명찰 하나를 더 달게 되었다. 그 명찰은 계급장과 같은 것이라 그 명찰을 달고 있지 다수의 아이들은 섭이가 내리는 명령을 따라 해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