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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방울 Nov 02. 2024

빨래터 처녀

빨래터 처녀


실버들 칭칭늘어진 빨래터에서

버들잎 흔들거리는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가씨야 니나이 몇이냐

열여덟이냐 열아홉이냐 니나이가 나는 좋더라

가슴커지고 엉덩이커지면 사랑찾아 가거라.


심우 철수 쓰다


국립문화박물관, 빨래터 <단원풍속도첩> 사진


<김홍도의 빨래터>

아버지의 글을 읽으니 김홍도의 빨래터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귀한 풍경. 지금이야 세탁기에 건조기가 흔한 세상이다. 없으면 안될 필수 조건. 엄마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우리가 어렸을 때 천 기저귀 빤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날 정도다. 가끔 욕실에서 따뜻한 물에 실로 떠진 보드라운 니트를 가볍게 조물조물 빤 적은 있지만 식구들의 그 많은 빨래를 손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진다. 


겨울에는 살얼음이 언 강가에서 냇가에서 아낙네들은 안그래도 추운 날씨에 볼은 빨갛게 드러낸 채로 얼어서 감각이 없는 손으로 바윗돌에 딱딱해진 빨래를 방망이로 두드리고 물을 짜내곤 했다. 옷이 젖지 않게 하려고 허벅지까지 치마자락을 올리고, 고쟁이를 둥둥 말아 허벅지에 걸친다. 흐르는 땀방울을 닦을 새도 없이 물인지 땀인지 분간할 수도 없이 여름에도 여인들은 방망이를 두드린다. 


지나가던 한 남자는 응큼하게도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여인들을 훔쳐본다. 멱을 감는 여인, 빨래를 하느라 숙인 여인의 목덜이를, 벌어진 저고리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젖가슴을 보며 숨죽어 침을 조심스레 삼킨다. 아버지도 지나가면서 여인들이 빨래 빠는 모습을 바라보았을지 모르겠다. 그들 중에는 결혼한 아낙네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눈에도 아릿다운 꽃처녀들이 빨래만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을까? 아버지는 옛날 분이시니 당연하게 받아들이셨을까? 그들 중에는 누이도 있을 것이고 동생도 있었을 것이다. 어리고 꽃처럼 예쁜 여자아이가 곱게 땋은 머리를 보며 언젠가는 시집 가겠구나 했겠지.



<박수근의 빨래터>

'빨래터'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한 분 더 있다. 박수근 화백. 그를 처음 접한 것은 남편을 처음 만나던 시기. 양구에 갔다가 우연히 들르게 된 박수근 미술관에서 그만 홀딱. 책에서만 보던 작품과 달리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애환을 담아 가까이 보면 볼수록 아프고 따뜻하고 그랬다. 그때 샀던 손수건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개성있는 그림을 그린 박수근 작가의 작품은 화려하지 않은 색체에 소박한 느낌이었지만 사람들의 삶이 모습을 잔잔하게 그려낸 모습이 인상깊기도 하고 감동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었으니 그는 가난하고 궁핍했기에 자신의 작품도 만들었지만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붓과 팔레트가 전재산이었던 가난한 그에게 빨래터에서 인생의 동반자인 딸 김복순 여사를 만나 어렵게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중에도 빨래터를 많이 그린 것은 그의 사랑, 그의 아내와의 추억 때문이었나보다.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45억 2천만원의 가치를 가진 빨래터 그림을 남기고 가셨으니, 그렇게 멋있는 작품을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참 감사한 일이다.)


아부지도 혹시나 빨래터에서 등장한 열 여덟, 열 아홉 살의 여인 중에 아부지의 첫사랑이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실눈 속에 의심의 마음을 일으켜본다.


글을 쓰는 동안 아버지의 빨래터에서 김홍도의 빨래터로 갔다가, 박수근의 빨래터를 지나 다시 아버지의 빨래터를 머문다. 글이란 참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다. 몇 줄 되지 않은 아버지의 글 하나로 김홍도가 살던 조선시대로, 박수근이 살았던 시대로 드나들 수 있다니! 그 모든 게 하나의 통로로 연결된 듯 나의 시야가 환하게 넓어지고 작은 기쁨으로 가슴도 환해진다. 


아버지의 글 한 편을 타고, 재미있는 조각 여행을 즐기다가 잘 돌아왔습니다. 오늘의 일기 끝! 

오늘도 브런치 항공편 no.15에 함께 탑승해 주신 승객 어려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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