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kim Oct 18. 2023

소중한 것에는 마음이 담겨있어

스타벅스 컵 이야기 

이 글은 스타벅스 컵의 입장에서 쓴 글입니다. 


그녀는 오늘도 물을 끓인다. 그리고 커피를 내린다. ‘오늘은 내가 선택될까?’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유리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오늘은, 피츠버그로 가야지. 여기 봐. 역시 다리의 도시야. 트램 타고 올라가서 본 풍경이 참 멋졌는데 기억나?” 그녀는 남편에게 또 여행 이야기를 한다. 오늘도 나는 선택받지 못했다. 그녀는 매일 커피를 내리며 내 옆에, 위에, 아래에 있는 다양한 친구들 중 하나를 가지고 간다. 처음에 나 혼자였는데 그녀는 여행에 관한 추억을 간직한다며 나와 같은 종류의 다양한 친구들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혼자였던 나는 처음에는 친구들이 생기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이제는 점점 좁아지는 내 영역에 대한 스트레스와 매 번 그녀의 선택을 받을까 받지 못할까 하는 초조함이 더해져 매일이 우울하다. 유리 장식장이 꽉 차서 아파트처럼 각각의 상자가 겹겹이 쌓여 있는 형편인데도 그녀는 여행을 갈 때마다 새 식구를 하나씩 데리고 온다. 

나에게도 전성기는 있었다. 내가 바로 그녀의 첫 번째 친구였던 시절.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 온 그녀는 미국에 오자마자 나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나를 그녀의 연구실에 데리고 가 한쪽 서랍에 두었다. 매일 그녀는 나를 꺼내서 깨끗이 씻어주고 향긋한 커피를 내리며 말을 걸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 어쩜 이렇게 특징들을 잘 살려 놓았지? 여기도 가봤고 여기도 멋지네’ 라며 칭찬 일색이더니 급기야 나의 형제를 다른 주에 있는 친구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친구도 보내주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녀는 마치 나의 생산지 스타벅스의 Where you are 시리즈에서 나오는 미국 50개 주의 컵을 다 모으기라도 할 듯이 하나 둘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이런 걱정을 할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미국을 가장 대표하는 도시를 품고 있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 캐피털 컵이니까. 미국 국가가 만들어진 상징인 모뉴먼트가 서 있고 백악관이 그려져 있으며 봄이면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벚꽃도 그려져 있다. 누구든 하나만 가질 수 있다고 하면 나를 선택할 테니까. 그러니 누가 오더라도 그녀는 나를 잊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나의 오만했던 과거를 무색하게 그녀는 나를 선택하는 일이 점점 줄다 못해 나를 기억하고는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가뜩이나 그녀가 여행을 갈 때마다 늘어나는 친구들이 부담스러운데 그녀의 친구들까지도 여행을 다녀오면 컵을 사다 주어 생경한 아이들까지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그녀의 고향 서울친구와 축구공과 맛있는 음식이 그려져 있는 스페인 친구, 멋진 요트와 서핑하는 이들이 있는 칸쿤친구까지.

그나마 나의 유일한 낙은 친구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그녀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역시 랍스터는 메인(Maine)이 최고야. 메인주 컵에는 굳이 랍스터를 두 개나 그려 넣어 놨구나. 매일매일 랍스터를 먹었어야 했는데. 블루베리 잼도 너무 맛있었고, 그거 사러 다시 가고 싶은데 10시간 운전은 역시 무리지? 메인(Maine)은 바 하버가 메인(main)인데 이게 그 그림인가? 아카디아 국립공원 절벽에서 파도치던 모습 같아. 캐딜락 파크 위에 가서 먹은 컵라면 진짜 최고였는데” 


그녀는 한참을 떠든다. 그녀를 통해 친구들의 모습들에는 하나하나 의미가 있음도 알게 된다.    


모름지기 물건이나 사람이나 다 쓸모가 있고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사는 법. 유리창 안에 있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의 쓰임을 다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픈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맑은 날 오후, 그녀가 갑자기 유리창을 열더니 나를 찾았다. 평상시 마시던 차가 아닌 향긋한 메이플향이 나는 홍차를 탄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건넨다. 


“이거 캐나다 메이플 홍차인데, 한번 마셔봐”

“웬일로 디씨 컵을 꺼냈어?” 남편이 묻는다.

“음. 좋은 차는 좋은 컵에 마셔야 하잖아. 좋은 사람이 준 차를 좋은 사람에게 대접하는데 가장 아끼는 컵을 꺼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뜨거운 물과 함께 눈물인지 땀인지 수증기인지 핑 돈다. ‘나를 잊은 건 아니었구나’ 그제야 만남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뜻을 알겠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누군가를 대접할 때마다 나를 꺼냈다. 속상한 친구의 말을 들어줄 때에도, 시어머니 스트레스를 푸는 친구에게도, 지친 남편에게 맛있는 차를 건넬 때에도 나를 찾았다. 그렇게 나는 그들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여행에 대한 추억을 담고 있지만 나는 그녀의 사람을 향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소중하게 간직한 것에 마음도 깃들어 있는 거야’ 문득 그녀의 말이 스친다. 


가끔 그녀가 혼자 있을 때 책을 꺼내 들고 나를 찾는다.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자주 그녀가 나를 찾지 않아도 서글프지 않다. 가을이 왔다. 어김없이 오는 가을이건만 그녀는 올해도 여행을 간다고 짐을 싼다. 또 다른 친구가 오겠지? 이번엔 어떤 친구일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올 지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이전 11화 오바마 대통령의 맛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