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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Jan 16. 2024

7시 기차를 놓치더라도 큰일 날 일은 없어

자식이 부모를 이겨 나갈 수많은 날들에 대하여



2023년 12월 31일 일요일. 오전에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아들은 저녁 알바를 하고 나서 다시 교회에 와서 송구영신예배까지 함께 했다. 올해는 마지막 날이 주일이라, 주일예배와 송구영신 예배가 하루에 두 차례 있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대중교통으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 설마 알바 마치고 피곤한 아들이 송구영신예배까지 올 줄 몰랐는데, 기어이 교회에 다시 참석했다. 덕분에 다시 한번 코끝이 찡, 했다.


여기까지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한 해의 마지막이자 새해의 첫 시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돌아가는 길. 아들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술집이 밀집한 옆동네 번화가에 자기를 내려달라고 했다. 우리에겐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예배에서 시작해 예배로 마무리하는 날이고 싶었지만, 아들에겐 달랐다. 아들에겐 공식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첫날. 이 날을 놓칠 리 없지!


"너무 늦지만 않게 들어와. 너 내일 친구들이랑 부산 간다며? 아침 7시 기차라서 빨리 일어나야 돼. 놓치면 큰일 난다."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신바람이 나서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옆자리에 앉은 남편은 내일의 거사를 위해 오늘을 준비하지 않는 아들이 당연히 못마땅하다.


"저거 저거, 저러다 내일 못 일어나지. 두고 봐라."


새벽녘. 잠결에 화장실 문이 덜컥거리고 샤워기 물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옅은 비누냄새가 내 방문 틈새로 밀려 들어왔다. 옆에 둔 핸드폰을 켜보니 새벽 4시. 아들은 좀 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자고 가지. OO야, 이제 들어온 거야? 기차역까지는 안태워다 줘도 돼? 우리끼리 알아서 갈게. 엄마, 나 지금 자면 못 일어날까 봐 바로 나가려고 방금 씻었어. 잠결에서 서로 몇 마디가 오갔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그래도 못 일어나는 것보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7시. 분주한 소리에 다시 잠이 깼는데, 아들 목소리다.

"엄마, 우리 기차역까지 좀 태워다 줄 수 있어? 나 아까 씻고 그만 깜빡 잠들었어. 다른 애들은 미리 예약해 둔 기차 타고 이미 떠났고, 나랑 친구 하나 남았어."


그럼 그렇지. 쯧쯧. 건너 안방에서 남편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휴라 좌석이 있을까. 아들은 그제야 여기저기 검색을 때리기 시작했고, 이러쿵저러쿵 친구와 의논하더니 수원역으로 가면 될 것 같다고 했다. 낙오자 둘을 태우고 가는 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놀러 가는 것조차도 뒤늦게, 기분 내키는 대로, 수습하듯 하는 아들이라니.


아들은 프로그래머 과정을 배우면서도 우리처럼 안달하지 않았다. 처음 일주일 간은 수업 시간에 배운 코딩 작업물을 가족 단톡에 공유하며 재밌어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엔 졸업식에 가야 해서, 졸업하고 친구들과 가는 첫 여행이어서, 겨울이니 스키장 한 번쯤은 가야 한다며 수업을 여럿 빠졌다. 나는 빠진 날 나간 진도를 못 따라갈까 봐 안달복달하는데도, 아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형들한테 물어보면 된다는 거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남편의 불안은 더했다.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바 스크립트의 정석> 상하권과 <객체지향 이야기>라는 책을 사서 아들에게 들이밀더니 본격 수업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읽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만화책도 안 읽는 애가 그 두꺼운 책을 읽을 리 없다고 했건만, 그 후에도 배우다 어려운 게 있으면 아빠한테 물어보라는 둥 잔소리를 해댔다. 아들은 역시 시큰둥했다. 그다음부터 밥 먹을 때마다 남편의 잔소리.


"너 그렇게 수업 많이 빠지면 안 돼. 못 알아 는다고! 아빠는 너 때 밤새 가면서 공부했는데도, 이해가 안 가서 엄청 힘들었어. 더 열심히 해야 돼. 안 그러면 진도 못 따라가."


남편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이 날만 해도 내일 여행을 위해서라면 아들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지 말고 집에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제멋대로 하다가 결국 기차를 놓치고, 빤히 보이는 루저의 행보는 이제 조금 개선할 때도 되었다.


근데 말이지. 인생이란  참 그렇게 옳은 소리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11시가 좀 넘은 시간에 부산역에 도착한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엄마, 우리 좀 전에 부산 도착했다!"

"그래, 고생했다. 생각 보다 일찍 도착했네?"

"그렇지? 애들이 아직 안 왔어!"

"엉? 그게 무슨 소리야?"

"애들은 무궁화열차 끊었거든. 우린 늦어서 KTX 타고 왔고. 그래서 우리가 먼저 도착했어. ㅎㅎㅎ"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해야 하나. 우리 부모의 모든 옳은 소리를 한순간 쓸데없는 꼰대들의 잔소리로 만들어 버리는 이런 순간들. 아들을 키우며 우리는 요즘 이런 순간들을 너무 자주 만나고 있다. 그러니 부모들이여~ 가끔은 아무리 세상 옳은 소리라도 입 닥치고 하루쯤 기다려 봐도 괜찮다. 우리 아들들은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빠르고 감각적인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더 좋은 촉을 가지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특히 돈이라면 본능적으로 우리 보다 먼저 반응하는. 그러니, 우리 바투 잡았던 고삐를 좀 느슨히 하고, 가끔은 묵묵히 아들의 뒤를 따라봐 줘도 괜찮을 것 같다.


내 그럴 줄 알았다,하고 내 어림짐작이 맞아떨어진 걸 자조하는 것 보다는 적어도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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