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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4. 2021

#18. 다시, 러닝 머신

- 고쳐 쓸 생각



몇 주 전, 친정 엄마와 함께 시골에 다녀왔다. 친정 아버지가 따로 사실 집이 완성되어 살림살이도 좀 넣어드리고 짐 정리 해드릴 겸. 친정 엄마는 "다 남들 보는 눈 때문"이라 하셨지만, "죽을 때까지 안봐도 좋겠다"던 여자 치고 세간살이 하나 하나에 정성이 뻗치셨다. 결국 1주일 정도 더 있으면서 땅도 정리하고 집 주변에 울타리도 치겠다며 우리 보고 먼저 올라가라신다. 우리는 어이가 없어 "여차하면 내려와 같이 살지도 모르겠다"고 농을 던지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의 별거는 친정 엄마의 오랜 꿈이었다. 다행히 우리에겐 시골에 할아버지 명의의 땅 한조각이 남아 있었다. 그간 아버지 명의의 땅들이 모두 누군가에게 팔려가는 동안, 할아버지 명의의 땅은 팔 수가 없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인생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 불모지가 아버지의 마지막 노년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오자마자 1박2일 동안 아들 둘과 뭘 해먹었나 싶어 부엌을 한번 휘릭~ 둘러보는데, 가스렌지 후드가 깨끗해져 있었다. 가스렌지 주변에 붙은 묵은 기름때도 없어졌다. 물론 이번에도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 삶이 늘 불행의 합으로만 이루어져 있진 않았다. 사춘기 접어든 아들이 며칠 동안 내가 차려준 밥을 거절하고 라면 나부랭이나 끊어먹을 때, 이러다가 진짜 내 아들이 몇 해 전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피씨방 소년처럼 게임에 미쳐 영양실조로 죽을 수도 있겠다 싶던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아들이 말간 눈빛을 한 채 인형 하나를 내밀었다. 엄마 주려고 만들었다고 했다. 이제 끝인 줄 알았던 마음에 잠시 희망이 피워올랐다.


그런 날도 있었던 거다. 행과 불행은 늘 손을 맞잡고 왔는데, 어쩌면, 괜찮았던 수많은 날 중에 유독 나는 불행했던 날의 기억만 조합하며 살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올 해 초, 열심히 러닝 머신을 걷고 있는데 친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오늘 시간 있어요? 학원 원장님이 은주 씨 좀 보쟤. "

친구는 동네 국어학원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그 학원 원장님이 이슬아 책방 같은 걸 만들고 싶다고 했단다. 브런치에 올린 내 글을 보여드렸더니, 맘에 든다고,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학원이라니. 게다가, 가르치는 일은 나와 영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단박에 거절했을 그 제안에 가슴이 살짝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2년 전 어느 날 문득 이웃집 러닝 머신을 구입하고, 그 날 부터 뛰기 시작한 것처럼. 내게 굴러들어온 뜻밖의 제안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길로 차를 몰고 학원으로 가는 문득, 고쳐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너무 내 본성대로만 하고 살았다. 남편도, 아들도, 내 인생도. 한번 잘못되 길을 돌아가거나 고장난 것을 고치며 살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마음이 다했는데 애써 노력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번 훼손된 것을 땜질하며 살만큼 위태로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회피한 것일지도 몰랐다. 한동안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아무 일이라도 벌어지길 바라지 않았나. 구차하더라도, 본성을 거슬러 뛰다 보면 분명 지금과는 다른 세상과 만나질 것이다.  


그러고 보니, 러닝 머신을 뛰는 동안 한번도 죽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이제 좀 다르게 살아 봐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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