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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4. 2021

#17. 쏭마담 투 컴

- 처음으로 무언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 작년 이 맘 때쯤 유튜브를 통해 '강남순'이라는 작가를 만났다. 미국 강단에서 활동하는 재미 교수였는데, '임마뉴엘 칸트,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코스모폴리터니즘과 연계한 종교 철학 담론'이 그녀가 가르치는 분야라 했다. 모두 내가 한때 흥미롭게 들여다봤던 철학자와 분야다. 한나 아렌트라면 이미 국내에도 친숙한 작가. 그런데 데리다는 누굴까. 유튜브에 검색해 보니, 그녀의 ‘데리다’ 강의가 찾아졌다. 그리고 첫 강의를 듣자마자 단박에 그녀에게, 그리고 데리다에게 반하고 말았다. 데리다의 ‘차연’이랄지, ‘투 컴 to come’ 개념 같은 게 내게 한줄기 섬광처럼 꽂혔다.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흔히 해체주의 철학자라고 하는데, 해체주의 철학은 철학 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거칠게 말해서 해체란, 기존의 권위적인 것들에 대해 모조리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것을 말한다. 진리라고 하는 것들이 정말 진리가 맞는지, 그 뒤에 감춰진 의도나 배후는 없는지, 다른 해석은 불가능한지. 여태 이 세계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에 딴지를 거는 철학이랄까. 그러다 보니 당연히 기존 철학자들로부터 공격도 많이 받았고 개념도 어렵다.


이런 식이다. ‘가능한 개념은 언제나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어떤 진리든 그걸 진리라고 고정하자마자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그렇게 모든 것을 해체하다 보면, 우리 같은 범인들은 그만 머리가 복잡해져서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같은 결론에 금세 도달하기 마련인데... 흠, 그러게 말이다. 나는 어쩌다 이런 말장난 같은 논리에 매혹된 것일까. 솔직히, 데리다 번역본 한번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내가 그 어려운 이론에 대해 알면 또 얼마나 알겠나. 다만 이 철학자가 이 세상을 견지하는 자세랄지, 그가 내세운 개념들이 품은 불확실성이나 불완전함 같은 뉘앙스가 좋아 보였다는 게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말한 ‘차연’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어로 'difference', 즉 다르다(differ)와 지연한다(defer)를 조합한 단어라고 한다. 강연에서 강 교수가 예로 든 ‘사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아무리 사랑에 대해 수십 가지 다양한 개념을 쏟아놓은들, 우리는 ‘사랑’이라는 '완전한 개념'에 다다를 수 없다. 사랑이라는 그 온전하고 충만한 의미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똑같이 대응될 수 없으니까. 따라서 온전한 의미는 영원히 지연된다. 지연되는 의미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처럼, 완전한 의미는 어딘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걸 그림자로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따라 나오는 개념이 ‘투 컴 to come’이다. 그 자체로 완전하진 않지만 미래에 도래할 어떤 완전한 것에 대한 열망 같은. 가령 '민주주의 투 컴'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있다 할 때, 이 땅에서는 그 이상에 딱 맞춘 민주주의를 만날 수 없다. 다만 그건 계속 도래하고 있는 그 상태로만 존재 가능하다. 그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어보아도 마찬가지. 이 땅에서 우리가 가치 두는 것들을 - 우정이나 소망, 가정, 정치, 대학 따위를 넣어보자. 그런 이상에 딱 맞는 완벽한 우정이랄지, 이상적인 가정이나 정치를 경험해본 적이 있던가. 아마도 대부분 고개를 저을 것이다.


강의의 하이라이트는 강남순 교수가 그 '투 컴'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라고 제안했을 때였다. 강남순 투 컴. 그리고... 쏭마담 투 컴.


그러자 사십 대 후반의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그러나 자주 낙심하고 별 볼 일 없는 현재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없었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목표를 두고 이뤄본 적도 없었다. 남들처럼 주어진 대로 대학에 가고, 적당한 나이에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어찌하다 보니 아이 둘을 낳고 경단녀가 되어 있는 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에게 꿈이 없었던가, 아님 그걸 이룰 자신이 없었던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있기는 있었는지 조차 잘 모르겠는 내가 있다. 이런 나에게 데리다는 말한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이 세상은 늘 여러 가지 의미로 충만해 있다고. 지금 내 앞에 닫힌 것처럼 보이는 그 세상은 어쩌면 여전히 내게 유효한 열린 문일지도 모른다고.  


강남순 교수의 데리다 강연을 들으며, 처음으로 나는 ‘그녀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내 과거가 그녀처럼 풀렸었다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경험하던 어린 시절, 외국어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 나라 언어들을 배웠다면. 단지 먹고사는 쓸모와 유용함으로써가 아닌 철학함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나라에서 평생을 함께 할 인생의 철학자를 만났다면. 그의 사유와 담론에 깊이 천착한 그것이 내 무기가 되고 삶의 방편이 되었다면. 그녀처럼 이렇게 코즈모폴리턴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변방인으로 살 수 있었다면!


처음으로, 내가 꿈꾸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물론 그건 그녀가 성취하고 이룬 꿈. 여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이제 와서 뭘, 이라고 했을지 모를, 학창 시절에도 없었던, 뭔가 되고 싶다는 꿈. 미래를 향한 기대감. 마담 투 컴. 그걸 내 앞에 열린 미래로 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 덕분에 나는 그 이후로도 자주, 가슴이 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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