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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병과 싸운다는 것

내 몸 사용 보고서 2

잔병치레로 골골대던 20대 초반을 지나 본격적으로 몸이 아프기 시작한 것은 23살 즈음이었다. 언제부터라고 딱 짚어서 이야기할 수 없지만, 어느 날부터 원인모를 증상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목과 어깨, 등과 허리, 골반까지. 매일 아침 자고 일어나면 밤새도록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았나 싶을 만큼 온몸이 욱신거리고 결렸다. 통증으로 인해 쉬이 잠에 들지 못했고, 겨우 잠이 들었다가도 몇 번이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늘 피곤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날 궤짝으로 술을 퍼마신 듯 멍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은 항상 바짝 말라 수시로 인공눈물을 넣어야 했고, 건조한 눈은 간지럽다 못해 쓰라리기까지 했다. 장은 또 어찌나 예민한지 조금만 자극적인 음식을 먹거나 신경 쓸 일이 생기면 다음날 화장실을 들락이며 몸에 든 걸 죄다 쏟아냈다. 하루 이틀 배탈이 나는 빈도가 잦아지더니 언젠가부터는 장이 꼬이고 가스가 차서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복통이 심해졌다.


PMS(월경 전 증후군)가 심해져서 생리가 다가오면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공격적으로 음식을 퍼넣었다.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을 내거나, 불안해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울음을 터뜨리길 반복했고, 전에 없던 극한의 생리통을 견디다 보면 한 달의 반이 지나가 있었다. 내과, 안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등 진료과목별로 동네 의원이란 의원을 다 돌아다녀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병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3분 간의 짧은 진료와 한 뭉텅이의 약이 전부였다.  


지금껏 먹어온 약이 몇 알인지 궁금하다. 어우 지긋해
병을 찾기 위해 해 본 것들

제일 처음으로 찾은 곳은 어느 대학병원의 구강악안면외과였다. 어디선가 몸이 아픈 것이 턱관절의 문제일 수 있다기에 치과와 구강외과를 번갈아 오가며 치료를 받아보았다. 교합이 맞지 않다기에 이를 갈아내기도 하고, 이갈이 때문이라기에 스플린트라는 보조장치를 맞추기도 했다. 턱에 힘을 빼야 한다며 근육에 보톡스 주사를 놓아주기도 했지만 모든 것은 그때뿐, 이내 통증은 돌아왔다.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해보아도 차도가 없자 치과에서는 같은 대학병원 내 정형외과로 나를 연계시켰다. 피검사부터 엑스레이, CT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다 해보았지만 몸에 이렇다 할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의사들은 스트레스 혹은 과로로 몸에 무리가 간 것 같다는 애매한 소견을 내주며 진통제와 근육이완제를 처방해주었다. 그러나 약들은 내 통증을 잠시 멈추게 할 뿐, 사라지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통증의학과였다. 그곳에서는 근막통증증후군이라는 병명과 함께 통증 부위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처방해주었다. 투두둑. 주삿바늘이 딱딱하게 굳은 근육막을 힘겹게 뚫고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의사는 많이 아프냐고 물었지만, 나는 슬프다고 대답했다. 아픈 내 몸을 낫게 하기 위해 나를 계속 더 아프게 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한의원과 각종 민간요법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한의원에서는 맥이 약하고 기가 허해서 그렇다며 한약을 지어먹고 꾸준히 침을 맞으라 했고, 어떤 곳에서는 온몸에 울혈이 많아서 그렇다며 사혈치료(통증 부위에 바늘로 구멍을 내어 부황을 떠서 피를 뽑는 무시무시한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남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온몸에 침과 바늘을 꽂고 피를 쏟아내면서 간절히 내 몸이 나아지길 바랬다. 그러나 그 치료는 몸에 여러 개의 바늘구멍과 멍자국만 남겼다.

프리다 칼로의 마음에 공감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질 때면 인근에 있는 마사지샵이나 안마시술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피부마사지를 받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누워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가 벌써 관리를 한다'는 시기 어린 소리를 듣기도 했고, 흰머리가 성성하신 할머님 할아버님들 틈바귀에 끼여 '어린 아가가 어디가 아파 벌써 이런 곳에 왔냐'는 동정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마사지를 받을 때는 통증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은 그때뿐이었다.


어디에서도 이렇다 할 해답을 찾지 못한 뒤로는 나 몰라라 하고 몸을 방치해두었다. 방치해뒀다기보다는 더는 무얼 해야 할지 알지 못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게 더 맞겠다.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찾아오는 통증은 나를 예민하고 부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고, 가끔씩 '이렇게 이유 없이 계속해서 아파야 한다면 그만 살고 싶다'는 몹쓸 생각까지도 해보았다.


나의 20대 일기장은 항상 아프고, 힘들고, 무기력하다는 말들로 가득 차있었다. 마치 우울증 환자의 투병일지처럼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과 '그만 아프고 싶다'는 말, 그리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 버겁다'는 말을 반복해서 적었다. 왜 아픈지,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지속되는 병은 사람에게서 희망을 앗아간다. 그렇게 답도 끝도 없는 병은 나를 갉아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몸이 아픈 이유를 찾았습니다

몇 년 동안 반복된 병원 투어에 지쳐갈 무렵, 아는 의사 한 분이 서울 세브란스에서 온 의사 선생님이 있다며 한 병원의 재활의학과를 소개시켜주었다. '서울 사람이라고 별 다른 게 있겠나, 또 사진이나 찍어보자 하고 약이나 먹으라 하겠지...' 별다른 기대 없이 그곳을 찾은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를 본 의사는 다짜고짜 약을 처방하는 대신 나를 앉혀두고 이런저런 질문들을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 '어느 부위가 언제부터 아팠냐', '언제 가장 통증이 심하냐' , '감정상태와 기복은 어떻냐' 등 으로 시작된 질문은 지금껏 내가 다녀온 병원과 받아본 치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던 의사는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간 참 힘들었겠다.'라고 했다. 처음이었다. 의사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도, 나의 고통이 누군가로부터 공감받은 것도.


이후 내 몸 이곳저곳을 차근히 만져보던 그분은 20대인데 신체 나이가 40대에 가깝다며 그간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왔냐고 물었다. 돌이켜보니 아등바등하며 이를 악물고 살아왔던 순간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학비를 버는 것인지, 학비를 벌기 위해 학교를 다니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일에 치여 살았다. 그리고 돈을 버느라 몸을 돌보지 못해 기껏 애써서 벌어온 돈을 병원비로 다 쓰곤 했다. 이 얼마나 속상하고 바보 같은 짓인가.

 

지금껏 몸에서 이제 그만 쉬라고 여러 번 신호를 보내왔지만, 모른 척하며 어거지로 버틸 뿐 쉬지 았았다. 몸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힘을 빼고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되려 힘을 주고 무언가를 더 하기 위해 애를 썼다. 사실 지금껏 계속해서 힘을 내는 법만 연습해왔기에, 대체 어떻게 해야 힘을 뺄 수 있는 건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힘들면 노오오력을 하는 게 아니라 힘을 빼야 한다.


의사는 몸의 모든 근육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곳이 망가지면 다른 곳에 부담이 가고, 그곳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곳들이 연달아 무리를 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몸이 이상신호를 보낼 때 멈춰서 쉬어주지 않으면 그 몸을 돕던 부분이 상하고, 그 부분을 돕던 다른 부분들까지 차례로 상하면서 서서히 몸 전체가 무너져 내리게 된다고. 나는 결국 내 몸을 무너뜨린 것이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윽고 그는 검사지 한 장을 들고 와 몇 가지 질문들을 하면서 아픈 부위들을 콕콕 짚어가며 누르기 시작했다. 양쪽 목과 뒷 목, 어깻죽지와 양쪽 날개뼈, 허리부터 골반까지. 어쩜 X-RAY 사진 한 장 없이 그렇게 정확하게 통증 부위를 찾아내는지 그의 손이 '꾹'하고 닿을 때마다 나는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누르는 곳마다 아프다는 나의 반응과, 증상에 대한 질문마다 '네'라며 긍정하는 나의 답을 듣던 그는 내게 '섬유근육통(fibromyalgia)'이라는 진단을 내려주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그 병은 류머티즘 계통의 자가면역질환이며 40대 이상의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병이었다. 또한 압통점을 포함한 전신의 만성통증을 유발하고, 우울과 불면, 안구건조와 과민성 대상증후군 등 내가 겪었던 다양한 증상을 동반한다고 했다. 그는 내게 조심스럽게 지금으로서는 명확한 발병 원인도, 치료법도 없는 난치병이기에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호전만 있을 뿐 완치는 없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정확하게 저 부위들이 아팠다. 365일 24시간 동안, 자그마치 10년을.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희와 비가 교차했다. 지난 몇 년 간 나를 괴롭혔던 통증이 답도 끝도 없는 난치병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슬펐고, 한편으론 이제 적어도 내가 왜 아픈 건지는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의 진단이 나를 '그저 골골대는 약골 혹은 꾀병을 부리는 사람'에서 벗어나 '어떤 병에 걸려 아픈 환자'라고 알려주었기에 정확한 이름표를 찾아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진단을 받은 뒤 그의 권유로 입원 치료를 시작한 나는 열흘 간의 입원기간 동안 하루 2번의 도수치료와 정신과적 약물치료를 병행했다. 건드리지 않아도 이미 아픈 곳들을 손으로 짓이겨가면서 섬유화 된 근육 다발과 근막들을 풀어내었고, 1알만 먹어도 하루 반나절을 약에 취해 멍하게 보낼 수 있는 약을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그 치료들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의 병에 대해 알게 된 나는 홀가분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병원을 떠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의 병에 대해 알기 위해 여러 가지 정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가면역질환이 면역체계의 이상으로 인해 생기는 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는 다시 말해 내 몸의 면역체계가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닌, 나 자신과 싸워서 결국은 스스로를 아프게 만든다는 걸 의미했다. 내 면역체계가 얼마나 멍청하면 나를 공격하는걸까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던 나는, 문득 '내가 지금껏 나 자신을 아끼지 못해서 내 몸이 나를 공격하는 병에 걸린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파괴하면서까지 해내야 할 일은 없다는 판단과 더불어, 앞으로 아픈 내 몸과 함께 살아갈 방법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본 이야기는 '내 몸 사용 보고서3 (내 몸을 살리는 방법)'으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duckyou-story/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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