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트라우마가 내 삶에 찾아왔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PTG(외상 후 성장)으로

트라우마(Trauma)

'상처'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트라우마트(traumat)'에서 유래된 말로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
심리학에서는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정신적 외상'이나 '충격'을 뜻함.


언제부턴지 알 수 없지만 이 트라우마라는 말을 많은 이들이 쉽게 쓰는 것 같다.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일에서도 흔히들 '나는 트라우마가 있다'라고 표현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과거에 겪은 끔찍한 기억으로 고통받는 장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나에게도 몇 가지 트라우마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엘리베이터에 잠시 갇힌 이후로 한동안 승강기를 타지 못했고, 교통사고를 겪은 뒤로는 자동차와 운전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사고가 났던 날처럼 비가 오는 날엔 집 밖을 나서는 것 자체가 두렵고, 평상시 차를 타다 조금만 쏠리는 느낌이 들어도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한 번은 타 지역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억수 같은 폭우를 만났다. 물구덩이를 지날 때마다 물이 차에 부딪혀 굉음이 쾅쾅 났고, 쏟아지는 비로 인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시야가 흐려졌다. 장장 2시간을 조수석에 앉아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러댔다. 목을 옥죄이는 듯 숨이 막혔고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차에 대한 공포를 극복해 보겠노라며 3년 만에 운전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호기로운 나의 도전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날 갑작스레 비가 내렸고,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느라 1시간 거리를 3시간 만에 왔다. 트라우마를 이기기 위한 나의 분투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 개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적인 사건 - 예를 들어 천재지변, 전쟁, 폭행, 고문, 사고 등 - 신체, 심리적 외상을 경험한 후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심리적 증상. 증상은 충격 후 즉시 시작될 수도 있고 수일, 수개월 또는 수년이 지나고 나서 나타날 수 있다.

주요 증상
① 침투 : 악몽, 환시, 반복적 반복, 해리, 플래쉬백 등을 통해 외상에 대해 반복적 재경험.
② 회피 : 외상 관련된 것에 단서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하거나,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함.
③ 인지와 감정에 부정적 변화 : 정서적으로 무감각해지거나 극심한 불안, 공포, 고통을 느낌.
외상의 원인이나 결과를 왜곡하여 누군가를 책망하며, 자신과 타인, 세상에 부정적 신념을 가짐
④ 자율신경계의 과각성 : 수면 장애, 짜증 및 분노 증가, 집중력 저하, 쉽게 놀람

-> 이러한 증상이 1개월 이상 지속되어 사회적, 직업적 기능에 장애 생길 경우 PTSD로 진단함.


머나먼 행성에서 찾아온 PTSD

PTSD라는 말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학부생 때였다. 이상심리학 과목을 들으며 DSM 진단기준(정신의학 현장에서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뉴얼)에 대해 배우던 그때만 해도 내게 PTSD는 전쟁을 겪은 세대나 재난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해당되는 다소 먼 세상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 단어가 내 삶에 가까이 다가온 것은 2년 전 임용고시공부를 하던 때였다. 정신병리에 대해 공부하며 PTSD의 진단기준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낯설지 않은 증상들을 접했다. 침투와 회피, 부정적 감정과 과각성까지. 그간 단순한 체력 저하 혹은 그래 봐야 가벼운 우울증 정도라 생각했던 나의 상태가 그 책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쓰여있었다.


계속해서 사고 당시를 반추하며 괴로워했던 것도, 남편이 그날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것도, 삶에 대한 회의감과 인간에 대한 혐오에 빠졌던 것도 모두 트라우마로 인한 증상이었다니. 그 여행을 떠난 나에 대한 원망과 나로 인해 남편이 고통받게 되었다는 죄책감,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물과 분노까지 모든 것이 트라우마로 설명됐다.


그 당시 공부했던 호로위츠의 스트레스 반응 이론에서는 외상을 경험한 개인이 '절규-회피-동요-전이-통합'의 단계를 통해 외상 사건을 수용하게 된다고 했다. 마치 무언가를 상실하고 애도의 과정을 겪는 개인이 자신의 상실을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결국에는 수용하게 되듯, 외상을 겪은 개인 또한 부정과 회피의 단계를 거쳐 끝끝내는 그 외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그는 한 사람이 외상을 기존 인지체계에 통합하지 못한 채 회피와 침투 증상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동요 단계를 지나 보내고 나면, 외상 경험이 조금씩 자신의 신념체계에 통합되는 단계가 찾아온다고 했다. 그 사건이 가진 의미를 충분히 탐색함으로써 외상 이후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확장되는 것이다.


PTG라는 선물

그 과정은 PTG의 개념과 흡사하다. PTG(Post Traumatic Growth)란 외상을 겪은 이들이 경험하는 긍정적인 변화로, 기존에 갖고 있던 가치체계가 변하는 것을 포함한다. 누군가는 PTG를 통해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고, 혹자는 감사하는 마음이 키우며, 혹자는 삶의 우선순위가 변화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단순히 외상 이전의 적응 수준을 회복하는 정도가 아닌,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총체적 변화를 의미한다.


외상 후 성장은 외상을 경험한 모든 이들이 겪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 중 극히 일부만이 경험하게 되는 깜짝 선물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외상이 주는 깜짝 선물을 받은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고로 인해 삶의 의미를 깨달았고, 삶이 주는 고통을 비교적 담담히 수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고는 분명 내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그것 이상으로 소중하고 값진 것들을 되돌려주었다.


내가 PTSD에서 PTG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터키 가족들의 공이 크다. 사고를 겪은 뒤 그들과 함께 지냈던 2달의 시간들이 나의 외상을 극복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게 가정이라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고 후 회복의 과정을 함께 겪으며 심적인 지지자원이 되어주었다.


실제 심리치료 현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치료법 중에는 '지속적 노출법'이라는 방법이 있다. 이는 안정된 상황에서 외상사건과 흡사한 자극에 단계적으로 노출시켜 외상으로 인한 공포를 둔감화 시키고, 현재 상황과 공포 반응의 불일치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 인지구조를 수정하게 하는 방법이다.

차를 다시 탈 수 있게 만들어 준 가족

터키 가족들과 지내면서 나는 '뜻밖의 노출 치료'를 여러 번 경험하였는데, 모든 것은 PTSD는커녕 심리치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족들에 의해 이뤄졌음에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차 안에서 폭발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내가 다시 차를 탈 수 있게 된 것은, 울부짖는 나를 달래어 준 엄마와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다 준 아빠의 노고 덕분이었다.


그들은 차라는 공간이 더 이상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안도감은 물론, 그 시간을 견뎌낸 뒤에는 눈부신 풍경이 주어진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또한 그들과 끊임없이 사고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 덕에 현실을 회피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슬픔과 공포, 분노와 좌절감 같은 감정들을 표현하고 수용받을 수 있었던 것 또한 내 상처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 사고는 끔찍한 기억과 부정적인 감정들로 점철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기억과 감정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져 오래도록 나와 내 삶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물론 살면서 언젠가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 모든 과정을 나 혼자서는 결코 견뎌내지 못했을 거라 확신하기에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마터면 끔찍하게 기억될 뻔 했던 시간들을 여러 가지 즐거운 추억들로 채워질 수 있게 해 준, '공포와 후회와 분노'로 가득할 뻔했던 내 마음을 '찡함과 사랑과 그리움'으로 채워준 나의 가족에게. 나를 외상이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지켜주고, 내가 크고 단단해 질 수 있도록 성장시켜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고통 너머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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