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셀럽 체험

해외에서 병원 가기 1

3년 전 사고 직후 일주일 가까이 병원신세를 졌다. 대퇴골이 탈골되어 거동이 불편했던 나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었다. 2인실이었던 탓에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은 나와 남편 단 둘 뿐이었지만 우리 병실에는 무수히 많은 분들이 드나들었다. 의사와 간호사, 간호실습생과 병원 직원, 경찰 그리고 처음 보는 다른 환자들까지. 아마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죄다 본 것 같다.


우리가 입원했던 곳은 BURDUR라는 외곽 도시에 있는 주립병원이었다. 우리는 그 동네에 존재하는 유일한 외국인이자 그 동네에 최초로 등장한 동양인이었다. 병원이라는 공간 특성상 그곳은 의료진과 환자 모두에게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었을 터. 아마 그들에게는 우리의 등장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병실을 나서는 날엔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인근 병실의 환자와 가족들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우리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입원 3일 차 즈음부터는 휠체어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느덧 익숙해진 몇몇 이들과는 안부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돌아오는 길엔 사람들이 챙겨 준 간식과 선물이 양손 가득 들려있곤 했다.




그곳에 있는 모든 분들 -의사, 간호사, 행정직원 및 그 외 모든 환자와 간병인들- 은 오직 터키어로만 소통이 가능한 네이티브 터키쉬였다.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번역기에 힘을 반드시 빌려야만 했는데,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도 최소 5번 이상 핸드폰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대화는 "아프다-> 괜찮아->? 이곳이 아프다-> 그렇다 그곳은 아프다->?? 링거 위치를 바꿔달라-> 바꿀 수 없다 -??? 왜 안되는가 -> 그곳은 원래 아프다- 읭?????"과 같은 요상한 패턴으로 이어졌다. 컨디션이 안 좋은 정도는 참고 견딘다손 치더라도 몸에 이상이 생겨서 말을 하고 싶어도 답답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루는 부모님 모두 자리를 비우고 둘만 남아있던 중에 갑자기 남편이 숨을 못 쉬겠다며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마음에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모두 퇴근하고 데스크조차 비어있는 늦은 시간이라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남편을 바라보던 나는 이대로 남편이 죽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그 당시 나는 혼자 걸을 수 없었지만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쪽 다리를 쩔뚝대며 병실 밖으로 나왔다.

간호사 시점에선 약간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싶다

대성통곡을 하며 울부짖는 나로 인해 같은 병동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들었다. 10명 남짓한 사람 무리를 끌고 당직실을 찾아온 내 모습에 간호사가 깜짝 놀라 뛰쳐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핸드폰을 갖고 오지 못한 나는 숨을 못 쉰다는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병실로 와달라는 말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 병실이 몇 호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갈 곳 잃은 손으로 버벅대던 나는 무작정 간호사의 팔을 잡고 병실로 이끌었다.


황급히 끌려온 간호사는 남편의 상태를 살피더니 바로 진통제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해 덜덜 떨고 있는 내 핸드폰에 '부서진 갈비뼈 아프다'라는 말을 남기고서는 쿨하게 사라졌다. 그 당시에는 그 상황이 분초를 다투는 위급상황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에 와서 그때를 돌이켜보면 어이없고 부끄러운 맘에 실소가 새어 나온다.


병원을 떠나던 날 우리는 온 병원을 돌며 여러 사람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옆 병실 환자들과 우리를 돌봐준 간호사님들, 병문안을 왔던 환자의 지인들과 행정실 직원들까지. 서로 모르는 온갖 사람들이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만남이 아니었다면 평생 서로가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지날 뻔 한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는 이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에 감사하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병원에서 이토록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게 될 줄은 몰랐다


keyword
이전 14화어느 날 트라우마가 내 삶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