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병원을 다시 방문한 것은 사고로부터 9개월이 지난 2년 전 봄이었다. 터키로 날아온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재판에 쓰일 증빙 서류들을 준비하기 위해 Denizli 인근에 있는 파묵칼레 대학병원을 찾았다. 그곳은 우리 담당 변호사 soner을 소개해준 nesrin 아주머니가 일하는 병원으로, 연구원인 아주머니 덕에 빠르게 검진 날짜를 받을 수 있었다.
데스크에서 접수를 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 대기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들이 척척 진행되는 듯했다. 엑스레이나 MRI를 찍어 몸 상태를 체크하겠거니 했는데, 뜻밖에 끌려간 곳은 방사선실이 아닌 정형외과 침대 위였다. 담당의사는 사고 당시 다친 곳을 이리저리 굽혀보며 각도를 재고 흉터의 길이와 너비를 측정했다. 무엇을 하는 건지 아무런 설명 없이 진행되는 검사에 우리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의 손에 덜렁 몸을 맡겼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에선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는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은 듯했지만 영어에 서툴렀다. 사고 당시 상황과 사고 이후 회복 정도, 한국에서의 치료와 그 이후 일어난 심리, 신체적 변화까지. 하나의 질문을 하기까지도, 우리의 대답을 이해하는 것에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언어문제로 그와 한참 씨름하던 중 문득 작년에 알게 되었던 의사 친구가 떠올랐다.
그 병원에서 뇌신경심리를 연구하는 Dougem은 유학생활 덕에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친구였다. 그날 마침 연구실에 있던 그는 나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와 주었다. 통역관이 나타난 뒤로 면담은 수월히 진행되었다. 친구는 담당의사의 질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물어봐주었고, 우리의 대답을 다시 의사에게 터키어로 번역해주었다.
사고 이후 상태에 대해 묻는 질문은 정신과에서 환자 상태를 진단하기 위해 묻는 체크리스트와 흡사했다.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감정상태나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지. 내가 상담할 때 흔히 내담자들에게 건네었던 익숙한 질문이 오갔고 나는 그것이 무엇을 확인하는지 알고 있었다.
1년의 시간을 돌아보다.
나는 솔직하게 때때로 입맛이 없고 잠을 못 자며 자주 악몽을 꾼다고 답했다. 그리고 여전히 차를 타는 것이 두렵고 가끔은 죄책감과 후회,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한다고 했다. '그럼 왜 그간 심리치료를 받지 않았냐'는 의사의 질문에 '재활치료비가 몇 백씩 나오는데 그럴 돈이 어디 있냐'는 말이 욱하고 목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 있는 친구 앞에서 화를 내고 싶지 않았기에 꾹 참았다. 온 마음이 만신창이라 상담을 받을 심적 여력이 없었다는 말도, 부부 모두 실직상태라 치료를 받을 돈이 없었다는 말도 차마 할 수 없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나는 '심리치료는 보험 적용이 안 돼서 많이 비싸다'고만 했다.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검사를 마치고 나오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찾아왔다. 사고 후 지난 1년 간의 생활과 나의 마음 상태에 대해 이토록 면밀히 들여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쉬울 줄 알았던 검사과정은 쉽지 않았고, 괜찮은 줄만 알았던 나의 마음도 괜찮지 않았다. 로비에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검사실 밖을 나온 뒤에도 나는 한참을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1년 전 그때의 우리와 다시 만난 우리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로 Dougem과 Nesrin을 불러 다 같이 식사를 대접했다. nesrin은 은퇴 후 안탈리아 바닷가 마을에서 노후를 꿈꾸고 있었고, Dougem은 독일로의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1년 전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그들은 내가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던 지난 1년 동안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년 전 첫 만남에서 나를 정성스레 치료해주었던 그들은 1년이 지난 지금도 기꺼이 내게 다가와주었다. 그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었고, 존재만으로 내게 큰 힘을 실어 주었다. 1년 전 나는 그들에게 그저 신기한 이방인이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들의 친구이자 이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