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신의 이름은 누가 지어줬나.

In the Mood - Moacyr Marques

by 이오십

운 좋게도 나는 늘 이름이 있었다.


*


내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밝히긴 그렇지만 아주 흔한 여자아이 이름이다. 같은 학년에서 같은 이름의 친구를 꼭 한 명 이상 마주칠 정도로 평범하지만 예쁜 이름이다.

하필 성씨까지 흔해서 내 이름이 조금 특이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딱히 이유 있는 애정은 아니고 살다 보니 정이 붙은 이름이 되었다.



내 이름이 흔한 정도, 발성 시 느낌이 ‘지혜’,라는 이름과 유사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는 나의 실명이 ‘지혜’라고 가정하고 글을 쓰도록 하겠다.


*


요즘 잠들기 전에 내가 내 이름을 바꾼다면 어떤 이름으로 바꿀까 고민해 봤다.


1시간 동안 눈을 감고 상상한다. 그러다 번뜩, 마음에 쏙 드는 이름 하나가 떠올랐고, 난 이 이름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싶어졌다. 기존 이름의 발음은 진지하고 정중한 느낌이 있어서 좀 가볍고 밝은 소리였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지은 이름이다.



거실에 누워있는 엄마에게 가서 “엄마, 나 이름을 바꾼다면 희동으로 바꿀 거야.”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래, 알았어. 희동이라고 불러주면 되는 거지? “라며 웃었다.


”희동아, 희동아, 희동아. 동이? “


이렇게 이름이 불리는데 꼭 내 이름 같진 않았다. 분명 내 상상 속에서는 딱 내 이름 같았는데.


*


그렇게 나는 가끔 기존의 이름의 삶에서 버거워지면 새로운 희동으로써의 삶을 상상한다. 희동으로 살겠다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게, 아마 쌓아온 역사가 없기에 자유롭다고 느낀다. 과장하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까지도 든다.


이를테면 ‘지혜’라는 기존의 이름으로써 행동할 때와 새로운 이름, ’ 희동‘으로써 행동할 때는 매우 다르다. 물론 나는 같은 사람이다. 지혜이기도 하고, 희동이기도 하고.



’ 지혜‘로써 가족들에게 이름이 불리면 항상 식사준비를 돕거나, 세탁기에 들어있는 옷 좀 함께 세탁해 달라는 부탁을 받거나, 아무도 나에게 강요한 적은 없지만 전통적 규범을 따르고, 전통적 가족의 가치를 지향하는 -착한 딸, 중재자 역할의 가족구성원- 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마음가짐이 묻어서 행동했다. 얘는 ‘지혜’고,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혜’에게 그런 기대를 하는 건 주변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그런 애니까.


*


이름은 관계를 내포한다. 사람들의 입에서 불려 나오는 내 이름. 역할도 포함한다.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는지,

내 이름을 불러주면서 무엇을 지시했는지,

어떤 감정을 담아서 내 이름을 부르는지…


아마 내 삶에서 내 이름이 불린 순간들만 편집해도 독특한 영상이 한 편 나올 것 같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의 소원이 들어가 있는 게 이름인 것 같다. 이름을 지어주는 건 특별하다.


생텍 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건 단순히 이름 붙이는 행위를 넘어 특별한 존재로 상대를 인식하고 관계를 맺으며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는 유명한 대목이 있다.

사막여우와 어린 왕자, 길들인다, 이름…


*


가끔 사람들에겐 이름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이 직접 지은 이름.


한음 이덕형, 오성 이항복, 추사 김정희,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삼미 정약용….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남자는 이름 대신 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유교 - 효에 기반한 것인데,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남이 함부로 부르는 게 불경하다고 생각해서 이름 대신 호를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특히 본인이 스스로 지은 호를 야호라고 하는데, 성격이나 특징, 혹은 본인의 이상이나 의지, 열망을 담아 짓는다고 한다.



*


사실 우린 이름이 더 다양하긴 하다. 인터넷상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다 우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넷상에서 지은 이름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인터넷상에서는 본명을 사용하는 게 더 희귀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떤 닉네임엔 별 의미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유머를 섞은 닉네임을 좋아하는데, 정작 마음에 든 적은 없다.


뱃살공주라던지.. 벼랑 위의 당뇨라던지. 아리아나 그런데 말입니다. 명란젓코난. 코딱지나바로, 아무리 생강 캐도 난 마늘… 어디서 많이 본 닉네임이긴 할 것이다. 나는 성공적으로 이런 닉네임을 만들어보지 않았다, 아직까지.


정리해 보면 유치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웃기잖아요… 아닌가.


*


지금 필명은 숫자 들어간 닉네임을 짓고 싶어서 이오십으로 지었다. 구구단 2단이기도 하고. 엄마의 성이 ‘이‘씨이기도 하고.


이일이

이이사

이삼육

이사팔

이오십


삼일삼

삼이육

삼삼구


사일사

사이팔


오일오

오이십


육일육


칠일칠


팔일팔


구일구


십일십


쓰고 보니 내 창의력이 이 정도라는 것에 실망하게 되었다. 역시 이름 짓는 것은 참 어렵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존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의 노고가 떠오른다.

*


희동이라는 이름은 그냥 희동이다.


이름을 지은 방식은 이러하다. 모음이 발음 상 밝고 어두움을 조절하니 입 모양이 길쭉하게 늘어나는 모음을 골랐다. 자음의 선택 기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음을 골랐다. 그리고 적당히 조합, 여러 한자들도 넣어보고.. 뭔가 이상한 뜻이 없는 단어인지 생각해 보고 발음해 보고… 그런 지루한 과정을 거쳤다.


한자로 하면 아주 직관적으로 기쁠 희에 아이 동 을 떠올리게 된다. 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짓고 ‘이거다!’라고 했던 것 같다.


*


아직까진 브런치 닉네임이 이오십이지만 언젠가부터는 ‘이희동’씨로 활동할 수도 있겠다. 인터넷 상에서는 개명이 간편하다. 그냥 “저 이희동입니다~ 그렇게 불러주세요.” 하면 되니까.


keyword
화, 목, 토 연재
이전 29화만족하는 삶을 위해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