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Valentine - NMIXX
폴터가이스트도 아니고 매번 아침에 눈을 뜨면 물건이 이동해 있다. 어제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에어컨 수리 기사님이 오시긴 했는데 네 방엔 들어가지 않았어.“
엄마, 아빠, 나 말고는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없다. 반려견, 반려묘도 없다. 하지만 어째서 방에 딸린 베란다에 둔 이젤의 위치가 창문 앞에서 붙박이장 앞으로 이동해 있는가? 그것도 내가 책상에 앉아 돌아봤을 때 보기 좋은 각도로.
내가 너무 신경증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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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웹툰 작가가 조폭에게 살해위협을 느끼고 일본 삿포로로 도망가는 꿈을 꿨다. 허리춤에 노란 중형견 한 마리를 팔로 둘러 안고 바쁜 걸음으로 어두운 저녁 시골길을 걷는다. 심각하다기보다는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는 우스꽝스럽고 재치 있는 연극 분위기였다.
함박눈이 길거리에 쌓여있고, 너른 양배추밭이 펼쳐져 있다. 사실 양배추 밭이었는지, 아무 밭이었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눈이 많이 온 가까운 해외라서 ‘삿포로’가 연상됐고, 삿포로의 특산물이 양배추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꿈에서 깨고 난 뒤에 짜 맞춘 것일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희고 너른 경작지에서 웹툰 작가는 꼭 안고 있던 노란 강아지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빠르게 내려놓았다. 이어서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나일론 소재의 더플백을 밭의 가장자리, 약간 움푹 파인 곳에 숨겼다. 정확히 말하면, 숨겨져 있지만 찬찬히 관찰하면 누군가 실수로 놓고 간 것처럼 꾸며놓았다. 아마 그 밭의 주인은 밭을 살펴보러 둘러보다가 버려진 듯한 낡은 가방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흰 눈이 쌓인 밭 둔덕에는 노란 고무줄로 돌돌 말아 묶은 현금 10만 원 다발을 조심스레 올려놨다. 마치 어떤 보상인 것처럼, 그 밭의 주인에게 신세를 져서 죄송하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50대쯤 보이는 아저씨 대여섯 명이 탄 트럭이 그 옆을 지나갔는데, 그중 한 아저씨에게 “이렇게 숨겨두면 이 땅 주인 분만 알아보실 것 같죠?”라고 확인차 물어보는 것이다. 그 아저씨는 “응, 그럴 것 같은데.”라고 대답하고는 그 십만 원이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시며 다시 트럭에 올라타 제 갈길을 돌아갔다.
꿈에서 깨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그 아저씨는 웹툰작가가 떠난 뒤 다시 그곳에 와서 십만 원을 주워갈 수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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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이전에 꿈 하나가 더 있다. 이것도 조폭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10일 뒤쯤 작가가 살고 있는 집으로 쳐들어간다는 정보를 듣고 짐을 부랴부랴 싸서 강아지와 고양이를 데리고 찜질방에서 외박하는 꿈이었다. 텅 빈 집을 조폭에게 보여줌으로써 허탕 치는 허무함을 느끼게 한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골탕 먹이려는 마음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어제는 또 무슨 꿈을 꾼 줄 아는가.
꿈속에서 날 조롱하는 가까운 사람을 암살하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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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자꾸 조폭이 나오는 건 ‘야쿠자와 가족’이라는 일본 영화를 인상 깊게 보고, 그 영화 ost를 반복재생 해서 그런 것이 틀림없다. ‘나’로 치환할 수 있는 웹툰작가가 꿈에 나온 건 최근에 재미있게 보는 일상 소재의 웹툰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그 작가님이 강아지와 고양이를 기른다.
자꾸 내가 뭔가를 숨기고, 조폭은 찾으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 현실에서 내가 가진 고민과 닿아있다. 누군가가 내 방을 뒤지거나, 내 물건 혹은 영역에 마음대로 침범해서 탐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최근 들어 내 방의 물건의 위치가 뒤바뀌어있는 것이 은근히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내가 가방에 숨겨둔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10만 원 정도의 값을 치르고 내 비밀을 어딘가에 허술하게 숨기겠다는 건 딱 내가 할 법한 행동이었다.
최근 내가 숨기고 싶은 것은 ‘가방’이었다. 10만 원 정도 준 빨간 인조가죽 가방. 왜 숨기고 싶은지 생각해 보면 올해 가장 과소비, 충동소비한 영역이 ‘가방’이었기 때문이다. 무분별하게 물건을 사들이는 내 모습을 들키기 싫었던 게 꿈으로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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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주일 간 잠을 잘 못 자긴 했다.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정도 잤다.
나는 잠에 대해서 꽤 예민하다.
부모님이 중고등학생 때 나에게 ’ 잠이 너무 많네.‘, 혹은 ‘지금 너무 늦잠이다. 어서 일어나.’ 등의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꽤 자주. ’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거 보기 싫어.‘ 등의 메시지를 대학생 때까지 꽤 들었던 터라, 집에서 잠을 자도 아침에 부모님 목소리가 먼저 들리면 심장이 덜컥, 하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었다.
‘사회인들은 지금 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있을 시간인데, 넌 지금 일어나는 게 맞니?‘라는 등의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분 나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삶을 충실히 사는 거고, 나는 나대로 생활 패턴이 있는 것인데.. 이 말을 들으면 ‘이래서 난 아직도 사회인이 아닌 걸까?’ 자기 비하, ‘그 시간에 일어나도 난 머리가 아픈데.’라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도 있었다. 11시 이전에 잠들고 다음 날 일어나면 머리가 맑다는 것, 그리고 일찍 자면 아무리 늦게 일어나도 부모님은 아무 말 안 하는 어느 정도로 합리적인 면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로 합의를 봐서 최근엔 아무리 늦게 자도 7시 반에는 꼭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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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오늘 꿈속에서 어떤 꿈같은 것을 숨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 꿈이 뭐야. 너 작가가 되고 싶은 거지? “
이런 식으로 물으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왜 내가 너한테 내 꿈을 말해줘야 하는 거지? 이런 방어적인 태도가 나온다.
그 이유는 다양한데, 가장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원초적인 답은 ‘자존감이 낮아서.’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답으로 다 귀결된다. “내가 말하면 이루지 못했을 때 부끄러울까 봐.”, “내가 말하는 순간 내 꿈에 대해서 타인에게 평가받는 게 피곤해서.”, ”누가 봤을 때 ‘넌 작가도 아니야, 게으르잖아.’ 혹은 ‘넌 그냥 작가라는 이름이 멋져서 그렇게 불리고 싶은 것일 뿐이잖아.’ 등으로 말할까 봐 두려워서. “ 등등등… 결국엔 원인이 나였다. “너 꿈이 뭐야”라고 질문을 받으면 설레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고,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은 애초에 ‘난 되기 어렵고, 지금 난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 안 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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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당장 이 질문에 내가 당당할 순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유를 알았어도 자존감이 낮은 건 당장 해결하긴 어려운 문제기 때문에.
좋은 하루하루가 모여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가는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내가 시나브로 자존감이 낮아졌듯이, 내가 다시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띄울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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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2026년도 다이어리를 사야 하는데, 사실 올해 다이어리를 꼼꼼히 적지 않아서 또 나는 낭비하고 마는 것 아닐까 싶다.
그래도 다이어리 하나에 낭비하는 건 괜찮은 소비이지 않을까, 이렇게 또 합리화를 한다.
올해 쓴 다이어리는 스탈로지 다이어리인데, A6사이즈와 B5사이즈 둘 다 번갈아가며 썼다. 주로 작은 사이즈는 메모를 썼고, 큰 사이즈는 구체적인 발상 같은 것을 적어뒀다. 1년의 1/2 분량의 종이인데 꽤 가볍고 표지가 튼튼해서 아마 내년에도 이 노트를 쓸 것 같다. 현재는 반절 정도 남아있어서 올해 안에 이 노트를 다 채워버리길 기대한다. 외출할 때 들고 다녀야겠다. 종종 일기도 쓰고, 생각도 정리하고, 계획도 하고…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란 걸 안다. 매일 아침이나 저녁 즈음 다음날 할 일을 다이어리에 적어두는 습관이 생기는 건 한편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편이기에 그렇다. 왜냐하면 꼭 해야 할 일은 어떤 습관처럼 자리 잡아서 굳이 몇 시에, 이 일을 해내겠다고 의도적으로 계획하지 않아도 그냥 그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하기 때문이다. 마치 손목시계가 발명되기 전의 인류가 자연스럽게 일상을 살았던 것처럼, 다이어리가 없었을 때 계획 없이 자연스레 일상을 살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면 나는 다이어리가 발명되지 않은, 상표출원되지 않은 세상을 사는 사람과 ‘일기’의 영역에서는 같은 세계를 사는 것이 틀림없다.
아무튼, 말이 길어졌다.
여전히 나는 스도쿠를 하루에 하나씩 풀고 있고, 하루에 3~8km를 달리고, 가끔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최근엔 수학 문제집을 짬짬이 풀기 시작했고, 버스 안에서는 짤막한 독서하는 습관이 생겼다. 잠자기 전에는 ‘문명 5’ 게임플레이 유튜브 영상을 하나 보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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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습관이나 일상을 점검한다는 점에서 매일 무엇을 했는지 기록해 보는 건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또 다이어리를 사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