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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장 Jul 18. 2017

[초단편소설] 바르셀로나에서 생긴 일

그래도 어제 행복했던 순간의 나는, 영원히 그 순간속에선 행복할테니

야경투어가 끝나고 혼자 온 사람들 몇명이서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밝고 귀여웠다. 내 이야기에 해맑게 웃어줘서 좋았다.

자신의 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서 대화가 즐거웠다. 그녀가 웃는 걸 계속 보고 싶어서 계속 웃기고 싶었다.


그녀는 내일 미슐랭 1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을 예약했다며, 같이 갈 사람 있냐고 물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까사밀라 내부도 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녀와 나, 그리고 또 다른 여성은 다음날 오후 1시 20분에 레스토랑이 있는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그녀가 생각났다. 이렇게 순식간에 마음을 뺏기나.


인간의 남성은 여성의 작은 호의도 호감으로 인식하도록 진화했다고 읽은 적이 있다. 그것이 원시시대에서 종족의 번영과 생존에 더 유리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포착해서 챌린지 하고 더 큰 기회를 만드는 것.


이 유전적 특질 때문에 21세기를 사는 나까지 아주 많은 헛수고를 한다.


90분만에 마음을 뺏긴 나는 다음날 그녀를 볼 생각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점심에 그녀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갔다. 그녀는 도착해 있었다.

인사를 하니 밝게 웃었다. 으허허허 자꾸 웃으면 나 착각하잖아.


같이 먹기로 한 여성도 도착하고 코스요리가 시작됐다.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의 맛은...맛이 뭔 상관인가. 나는 그녀와 같은 시간을 같은 장소에서 보내고 있다는 것만이 좋았다.


광대한 우주와 억겁의 시간에, 지구라는 행성,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에서 찰나의 순간을 그녀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3명이서 까사밀라 내부까지 같이 보고, 나머지 한분은 비행기 시간 때문에 먼저 갔다.


그녀와 나 둘이만 남았다.
세상에나. 살다보니 이런 좋은 날도 온다.



우리는 바르셀로나 명소 이곳저곳을 걸어다니면서 까사밀라에서 뭐가 좋았는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재미있는 물건을 파는 가게를 들어가서 별걸 다 판다며 깔깔 웃었다. 성당 앞 바에서는 맥주를 마셨다. 일, 어린 시절, 영화, 운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 흥미로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놓치기 싫었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었다.


저녁 9시에는 까탈루냐 음악당에서 플라멩고 공연을 보기로 했다. 그녀가 어제 만났던 분들에게 같이 볼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자고 했다. 나는 단톡방에 물어봤지만 사실은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도 오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기뻤다. 이 날 만큼은 세상이 나의 편이었다.



까탈루냐 음악당의 내부는 정말 예뻤다. 나는 그녀와 음악당의 내부가 같이 잘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핸드폰 액정에 비친 음악당 내부의 모습과 그녀의 예쁜 웃음이 아주 잘 어울렸다.


공연은 며칠 전 레이알광장의 타란토스에서 본 것과 완전히 다른 레벨이었다. 정말 정말 훌륭한 공연이었으며, 나는 완전히 감동했다.


그녀는 공연의 한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소름끼친다는 듯 팔을 가슴으로 모으면서 와아...으아...라며 감탄사를 냈는데, 오마이갓 이건 너무 귀엽잖아.


그녀는 이 공연이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거라고 했다. 나는 그 기억속에 나도 함께 자리하길 바랐다.

공연이 끝나자 11시였다. 그녀가 머무는 호텔까지 같이 걸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으나 나는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녀가 묵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오늘 즐거웠다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내일 공항 잘 가고 조심히 들어가라고 말했다.
나는 마지막 일정 재미있게 보내고 잘 자라고 말했다.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뒤를 돌아 걸었다.
열 발자국 즈음 걸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호텔 정문 기둥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라? 비포 선라이즈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었는데?
나는 이렇게 끝났다.



마지막 밤을 그렇게 보내고 현실로 돌아왔다.

모든 희망이 증발해버린듯 하다.
나는 영원히 고통에 불타고 빛 한점 없는 어둠속에 갇힐 것만 같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펼쳐져 있고, 평행우주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제의 행복했던 나는 영원히 행복한 그 순간에 머물러 있을테니, 그거 하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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