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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장 May 16. 2019

[초단편소설] 축하받지 못한 경사

뭐라고? 그럴리가.

방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옷방에 들어와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다. 야근하고 퇴근해서 10시 즈음 집에 들어왔는데, 일찍 퇴근해서 집에 있던 아내가 현관까지 마중을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보통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어 왔어? 라고 얘기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오빠, 내가 무슨 말 할지 맞춰봐”

표정이 밝은걸 보니 뭔가 좋은 일인가 보다. 이럴 때는 나도 장단을 맞춰야 한다.

“뭔데 뭔데 뭔데 말해봐 말해봐” 나도 리액션으로 분위기를 달궜다.

“우리 아기 생겼어” 아내가 양손을 배 위로 올리며 감동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는데.


“정말 잘됐다. 축복할 일이 생겼네. 고마워” 일단 급한대로 생각난 리액션을 하고 그녀를 살짝 포옹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겠다고 옷방에 들어왔다.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신체적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는 나 때문이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관수술을 했다. 사회초년생일 때 나에겐 아이가 없는 삶이 더 어울리겠다 싶어서 수술을 했다. 그리고 몇년 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고 아내는 아이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우린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놓칠까봐 정관수술 했다는 것은 이야기하지 못했다. 양심에 찔렸지만 그녀가 나와의 결혼을 거부할까봐 두려웠다. 당시만 해도 웨딩검진이라는걸 많이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나의 정관수술 사실이 드러날 일도 없었다. 결혼부터 하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적당히 이야기하고 모면하면 되겠지 라며 떠오르는 양심의 목소리를 다시 눌렀다.


그리고 결혼했다. 처음 1년 정도는 콘돔을 착용하고 섹스했고, 그 다음 1년 정도는 이제 아이를 갖도록 노력하자라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콘돔 없이 했다. 그리고 3년차에 접어든 올해도 계속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이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고 대책을 세우자는 얘기를 하던 요즘이었다. 


미안했다. 내가 했던 정관수술은 무도정관수술이다. 그냥 묶는 것이 아니다. 정관을 자르고, 잘려진 양쪽을 지져서 관을 막고, 또 양쪽을 묶기까지 해서 웬만한 인간의 신체능력으로는 재생되기가 힘들다는 것이 의사가 해준 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두 가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인간 이상의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아내가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한 것이다. 나는 나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가 화를 내야 하는가. 미안한데 화도 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오빠 왜 안나와?” 아내가 거실에서 나를 불렀다.

“어. 일 때문에 카톡이 좀 와서. 이제 나갈게”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열었다. 거실로 걸어갔다. 소파에 앉은 아내가 포옹을 하자는 듯이 양팔을 활짝 벌리고 웃었다. 나는 차마 포옹할 기분이 아니라서 그냥 아내 옆에 앉았다.


“왜 그래? 회사에 무슨 일 생겼어? 아내는 내 반응이 예상하던 것이 아니라서 놀란 눈치다.

“아니. 그런건 아니고 사실 나도 할 말이 있어서”

“응. 말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 아내가 내 등에 손을 올리고 쓰다듬었다.

“아마 많이 놀랄거야”

“괜찮아. 오늘 이미 가장 놀라운 일이 생겼는데, 더 놀랄 일이 있겠어?”

“나…사실 자기랑 결혼하기 몇 년 전에 정관수술 했어. 미안해”


분노, 배신감, 슬픔, 미안함이 마구 뒤섞인 표정이 아내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기야. 이제 자기가 말해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제부터 아내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너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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