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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장 Sep 12. 2019

[초단편소설] 어떤 사디스트

인류는 그걸 운명이라고 불렀다

인류는 때로 놀라운 일을 하곤 했다. 한 에피소드는 이렇다. 인류가 스스로 그들이 사라질 날을 알게 됐고, 그 사실을 전 세계에 발표한 것이다. 그 날의 정오. 전 세계는 동시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매체와 채널을 통해 같은 방송을 시작했다. 화면에는 UN의 로고가 박힌 연단과 마이크가 보였다.


잠시 후 UN 사무총장 토니 파커가 등장했다. 그가 말했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전합니다. UN 가입국가의 정상들과 협의를 통해 제가 발표합니다. 지구는 한달 뒤 거대한 운석 수백개와 충돌합니다. 지구에서 공룡을 멸종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운석보다 파괴력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각국의 우주 관련 기관들은 1년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대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공식발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바로 몇 주 전까지도 전 세계에서 선발한 최고의 연구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인류를 살아남게 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찾지 못했습니다” UN 사무총장은 말을 멈추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게 됐습니다. 우리 인류가 반목하고 분노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끝을 맞을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인류는 위대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문명과 예술, 사랑과 평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과 유혹속에서도 조금씩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비극을 딛고 일어나 감동적인 이야기도 남겼습니다. 남은 지구에서의 나날들도 위대한 발걸음을 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같은 행성에서 같은 시간을 보낸 것에 감사합니다. 저는 지구에서 남은 한달동안 주변에 사랑을 베풀며 보낼 계획입니다. 당신은 위대합니다. 우리는 위대합니다. 모두가 소중합니다. 감사합니다”


UN 사무총장의 발표가 끝나자 각 나라의 방송으로 넘어갔다. 각 나라의 지도자들은 방송에서 일상을 지키고 서로 배려하며 마지막까지 인류 스스로 존엄을 지키자고 말했다. 위대한 인류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자고 했다.


전 세계에서는 또 하루가 시작됐다. 하지만 UN과 각국의 지도자들이 걱정했던 대혼란은 없었다. 


누군가는 평소처럼 출근을 하고 누군가는 하지 않았다. 공공부문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책임을 다 한다며 대부분 똑같이 일을 했다. 어떤 이는 먼 곳에 있는 가족을 보러 떠났다. 기업들은 유보금을 풀어 기부금을 내고 불우이웃과 노숙인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다. 호텔은 노숙인들을 위해 빈방을 제공했다.


앞으로 한달만 먹고 살 것이 있으면 충분했기에 사람들은 욕심 부리지 않았다. 전 세계가 자원을 나누자 전 인류가 한달을 버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인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자존심 때문에 못했던 사과를 했다. 사람들은 앙금을 풀고 용서했다.


모든 전쟁이 멈췄다. 적에게도 축복을 빌어줬다. 일본의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깊이 사과한다고 발표했다. 한국과 북한은 남은 한달간 국민들의 이동과 교류를 자유롭게 했다. 이산가족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국과 북한은 더 이상의 불필요한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고 우방국으로 지내기로 했다.


모두에게 예외없는 끝이 주어졌기 때문일까. 그 지구에서 살고 있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한달이었다. 인류는 처음으로 자신들 모두가 결국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신은 공평하다라는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사람들은 각자가 머물 수 있는 곳에서 가족, 친구, 지인들과 함께 모였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손을 잡은 채 끝을 기다렸다.


전 인류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왜 진작에 이렇게 살지 못했을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걸 지금 깨닫다니 안타까운 일이야’

수많은 운석이 대기권을 통과하며 굉음이 들렸다. 그 인류는 끝을 맞았다.



수백억년이 흘렀다. 


그 지구에는 거의 비슷한 지능과 신체를 갖고 있는 인류가 또 출현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의 인류의 존재에 대해 당연히 알지도 못했고, 또한 당연히 그들의 깨달음도 알지 못한 채 서로 증오하고 싸우고 죽였다. 사랑도 있었지만 분노를 모두 덮지는 못했다. 그리고 또 그 인류도 수십만년 뒤 떨어지는 운석에 의해 멸망했다.


내가 방금 한 얘기는 1457-평행우주를 운영하는 신이 하는 일이다. 1458-평행우주를 운영하는 나는 그가 하는 일에 왈가왈부할 권한이 없어서 그냥 지켜볼 뿐이다. 저 신은 사디스트 기질이 있는지 저걸 영겁의 시간동안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다. 그는 신이라서 마음대로 할 뿐인데 인류는 그걸 운명이라고 부른다.


나는 저 난장을 보기 싫어서 내 지구에는 식물만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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