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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향 Jun 04. 2024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오구오구 어화둥둥

육아를 하면서 제일 힘든 게 있다면,

언제 어떻게 아이의 감정이 변해서 돌연 알 수 없는 생떼와 짜증을 부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랑 하루종일 뒹굴러야 할 때는 몇 번이고 그런 일들을 겪으니 재우고 나면 오늘 하루 잘 싸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도 마음도 지쳐 나가떨어진다. 반면 등원을 시키는 평일에는 아이들을 만나기에 앞서 긴장감이 차오르는데 예나 지금이나 그 긴장감이 싫어서 차라리 주말이 더 낫다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등원 후 나의 시간은 포기할 수 없지만.




큰 아이를 두고 유독 그런 아이라고 할 순 없지만 작은 아이에 비하면 감수성이 예민하고 좀 세심한 구석이 있어 종종 감정 맞춰주는 게 어렵다. 지금이야 말도 잘 통하고 나름 협상도 잘 되는 데다 스스로 왜 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거나 그 시작을 모르겠으면 울음을 뚝 그치곤 하지만 때때로 요동치는 감정에 멀미가 나게 만들 때도 있다.

아이의 감정을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수용해주어야 한다는 여러 육아 서적들의 빠삭한 이론을 현실 육아에 대입하기 바빴던 지난 시절, 고난과 시련으로 이루어낸 4년 차 엄마로서 나는 작은 아이의 울음엔 다소 냉정했다.


말로만 냉정한 것이 아닌, 정말 냉정하게 굴었다.

이미 첫 아이에게 모든 열정을 다 쏟아부어 작은 아이에게 쏟을 의지나 열정이 없는 사람처럼 혼을 내기도 하고 윽박을 지르기도 하며, 아이가 무서워하는 무언가를 얘기하는 등으로 온갖 방법을 다해 아이의 울음에 대처했다.

사실 작은 아이는 잘 울지 않는다. 나는 대체로 허용하는 게 많은 편(이라고 자부하는)인지라 아이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한 번 해볼 수 있게 기회를 주어서 마냥 울고 보는 일이 적기도 하다. 더불어 작은 아이의 성향도 어느 정도 한계가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주면 더 요구하는 것 없이 잘 따라오는 듯하다.

작은 아이는 주로 큰 아이와 싸우다 먼저 꼬집거나 물고, 때려서 나한테 혼이 나면 운다. 혹은 덩달아 큰 아이가 때리거나 꼬집으면 운다. 그런 상황에 대체로 나는 작은 아이를 혼냈다. 깨물고 꼬집는 정도가 심하기도 하고 매번 큰 아이가 당하고 울기만 해서 작은 아이의 문제적 행동을 혼내기 바빴다. 화를 내는 게 아이에게 좋을 리 없다는 생각은 혼을 내는 중에도 했지만 한 번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면 좋게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다.


큰 아이가 24개월 이전에 지금의 작은 아이만큼 혼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큰 아이를 대하듯이 작은 아이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어서 나 스스로도 마음이 불편하고 쓰리다.


매번 혼내기만 하던 방식을 바꾼 건, 아이의 물고 때리는 행동이 혼난다고 나아지지 않아서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작은 아이가 큰 아이의 손등을 물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거나 큰 아이 눈두덩이를 꼬집어 피가 나는 걸 보면서는 분노를 억누르는 게 당시의 내겐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작은 아이의 이야기를, 감정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건 잘못한 일인 듯하다. 지금에서야 이를 확신하는 건 속상해서 그런 거냐고 먼저 묻기 시작한 나의 변화에 작은 아이도 어느 정도 발맞춰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아이를 그만 혼 내기로 마음을 먹고,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려 노력한 이후부터 꼬집거나 물고, 때리는 빈도가 줄었다. 그 이전엔 점점 심해져 이 문제적 행동으로 금쪽이 방송 출연이라도 고민하게 될까 봐 걱정인 수준이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지금은 딱히 걱정이 되지 않는다. 아이가 변하고 있다. 그렇게 느낀다. 적어도 아이가 내게서 더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오늘 작은 아이가 밤잠에 들기 전 응아를 눴다. 아이의 기저귀를 벗겨 씻긴 뒤, 원래 하던 대로 변기에 버리고 빠빠이~를 시켰는데 작은 아이가 웬일인지 대성통곡을 했다. 영문을 몰라 왜 그러는지 물었지만 계속 변기를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거리고 울길래, 혹여 욕실에서 넘어질까 싶어 다급히 마무리를 짓고 아이를 안아 들고 나왔다. 작은 아이는 새 기저귀를 입힐 수도 없게 몸을 뒤틀면서 울었다. 큰 아이가 옆에서 똥을 만지고 싶었던 것 같다고 했다. 맙소사?

큰 아이의 말에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작은 아이에게 몇 개의 선택지를 줘봐야겠다는 힌트를 얻었다. 아이가 우는 걸 혼 낼 일은 아니니 여태껏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어화둥둥 내 새끼 오구오구를 해보자 싶었다.


“**이가 응아를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어?”

“아니!”

“그럼 **이가 응아를 변기에 직접 버리고 인사하고 싶었어?”

“응!”


하.. 이거구나. 원래 하던 대로에서 더~ 많은 걸 스스로 해보고 싶었구나. 그 과정을 말로 못해 발만 동동거리며 울었던 거구나.


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몰라서 그런 거지만 미안하다 사과를 한 뒤, 다음엔 직접 버리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로써 아이가 기저귀에 대변을 봤다면 그걸 치우는 과정이 더 복잡해지고 번거로워졌지만 어쩌겠는가, 아이가 그러고 싶다는데. 그것만으로도 아이가 웃을 텐데.




요즘에도 작은 아이는 제 화를 소리를 빽 지르는 것으로 표출하거나 큰 아이를 꼬집는 것으로 풀 때가 있다. 하지만 안 된다는 걸 알려주면 곧잘 수긍하고 사과도 한다. 빈도도 낮아졌지만 꼬집으려 손을 뻗었다가 거두는 행동도 보이고 언젠가 두어 번은 큰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게 아닌, 나를 찾아 화나는 이유를 말한 적도 있다.


내가 무엇을 옳게 하고 있는지, 이 방향이 맞는지 확신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작은 아이에게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을 품은 이후로 아이 또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나의 사랑을 틀림없이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향한 내 사랑 또한 전에 없던 포용을 먹고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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