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밍꼬 Jun 30. 2021

엄마의 땅콩버터

땅콩버터만큼 퍽퍽하고 진득한, 그렇지만 잘 살고있는 이야기

   

“아휴 정신없어. 얘들아 뛰지 좀 말라고”


  아기띠에서 푹 잠들어 버린 넷째를 안은 채 주방 상부장을 열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아이들 간식 상자를 꺼냈다. 거실에는 누나가 그린 그림을 뺏어 든 미운 세 살인 셋째가 뱅글뱅글 뛰어다니고 그 뒤로는 화난 표정의 둘째가 종종 거리며 녀석을 잡으려고 따라다닌다. 간식 통 안에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쿠키와 초콜릿, 과일 맛 막대사탕과 곰 젤리 등 이것저것이 들어있다.


  아이들 간식 상자이지만 사실은 내 보물 상자다. 통 안을 이리저리 휘적거리며 뒤지다 작은 오트밀 사탕과 검은색 포장의 아몬드 초콜릿이 당첨되었다. 오트밀 사탕을 쏙 까서 입에 넣으니 잠깐의 행복이 찾아온다. 눈앞에 어질러진 거실에서 잠시 나를 잊게 해 준다. 이번에는 아몬드 초콜릿 껍질을 벗겨서 오도독 씹으며 눈을 감는다.   




 “엄마 밤늦게 뭐해?”


공부를 하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나오니 엄마가 냉장고를 열고 그 앞에 서 계셨다. 또 땅콩버터를 커다란 숟가락으로 퍼서 드시고 계신다. 나한테는 매일 살찐다고 뭐라고 하더니 자다 깨서 이 밤에 땅콩버터라니!! 그래도 엄마는 나이가 먹도록 살도 안 찐다. 하늘은 불공평하다.


“엄마 자다 깨서 이 밤에 땅콩버터를 왜 드셔요.

아빠는 아직도 안 왔어?”

“모르겠다, 전화도 안 받으시네”


  시간은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간다. 몇 년째 사업이 안 된다며 힘들어하는 아빠는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늦게 오셨고 가끔은 너무 취해 엄마가 어디론가 찾으러 가야 하는 날도 있었다.  장소는 매우 다양했다.


  오늘은 아빠와 함께 은행에 가서 아빠의 사업에 쓰일 자금을 대출받아 오셨다고 한다. 교사인 엄마의 월급과 신용은 지속되는 불경기 속에 흔들리는

우리 집을 뚝심 있게 지탱해 주었다.


  수험생인 오빠는 아직도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수험생이 학원에 가고 늦게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아빠를 기다리다 자다 일어나 땅콩버터를 먹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거나 때론 아빠가 들어와 술에 취해 서로 큰소리가 날 때면 집안의 고독과 무거움을  나만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 억울했다. 집안에서 만들어지는 무거운 공기는 누구에게라도 탓해야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땅콩버터를 몇 번 퍼 드시고는 뚜껑을 닫고 냉장고에 넣었다. ‘틱’ 하고 닫힌 냉장고도 기운이 없다. 잠이 달아난 건지 연락 없이 늦는 아빠를 기다리느라 잠을 쫓아내는 건지 엄마 방에서는 작은 전등이 켜지고 책을 펴는 소리가 났다.


  아까 엄마가 차려주는 저녁밥을 먹으며 엄마가 같이 먹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항상 식탁에 앉지도 않고 서서 빵을 먹는 엄마를 보면

왜 앉지 않고 서서 밥도 아닌 빵을 먹느냐고만 했다.    


  아몬드 초콜릿 한 알은 입안에서 금방 사라져 버리고 초콜릿의 쌉싸름한 맛과 아몬드의 텁텁함만 남았다.

금세 사라져 버린 초콜릿에 눈을 뜨니 냉장고 앞에 엄마와 땅콩버터도 사라졌다. 그리고 내 앞에는 네 아이들이 있다.


결혼 전에는 삼시세끼 차려진 밥을 먹으며 식사를 거르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았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밥순이가 빵순이가 되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차리고 먹이고 나면 진이 빠져 먹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버린다. 내 밥공기 하나라도 설거지 거리에서 덜고 싶다. 그럴 때마다 간식 통을 열고 부스럭거리며 초콜릿과 과자를 꺼내 먹게 되었다. 에너지 부스터처럼 입안에 설탕과 밀가루가 순식간에 채워주는 만족감은 잠깐의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이제야 알겠다. 그때 엄마가 왜 땅콩버터를 드셨는지 말이다. 이번 주말에는 맛있는 고기와 과일을 사서 친정에 가야겠다. 모두 같이 잘 차려진 맛있는 식사를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은 지금부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