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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밍꼬 Jul 13. 2022

무던한 위로

복잡하고 섬세한 시대, 나에게 위로되는 무던함

“산봉우리야 그만하고 밥 먹자. 엄마 화낸다.”

  화요일 아침, 셋째의 투정에 나는 예민했다. 오늘 오후 대학병원에 첫째의 성장검사가 있다. 9살인 첫째는 얼마 전부터 가슴이 스치기만 해도 아프다 했다. 한참 크는 여자아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만 이번엔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자주 말했다. 우리 첫째는 키도 평균 살집이 있지도 없지도 않다. 이 또래 아이 성장검사가 드문 일은 아니지만 나는 걱정 없이 지나갈 줄 알았다.


  검사받을 병원을 찾아도 오랜 대기를 해야 한다는 말뿐. 아프다는 아이의 말은 들리는 건지 모르겠을 신랑의 귓구멍을 보며 외로운 한숨을 쉰다. 혼자 전전긍긍하며 그나마 빠르게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병원에 전화를 했다. 병원에서는 마침 취소된 예약이 있다고 당장 내일 검사가 가능한지 물었다. 우리는 다음 날 오후 병원으로 향했다. 집 앞에서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 대중교통을 택했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7월의 날씨는 덥고 습했다. 비올 듯 구름 낀 하늘은 내 마음 같았다.


   예정보다 이르게 병원에 도착했고 바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아이의 키, 몸무게, 부모의 키, 나의 초경 연령 등 간단한 정보를 적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화장기 없는 모습에 머리를 질끈 묶은 의사는 아이에게 앉으라고 하더니 청진을 하고 가슴을 쓱 만져 보고 별 말없이 수납을 하고 뼈 사진을 찍어오라고 했다. 다시 진료실로 가니 잠시 후 엄마만 들어오라고 한다. 들어가자 의자에 앉으라더니 앉기도 전에 의사는 무심히 말을 다. 가슴 성장은 확실하고 뼈 나이가 1년 반이 빠르다며 피검사를 해야 한다고 한 달 뒤 예약을 잡으란다. 눈 맞춤 없는 20초의 시간, 그럴 거면 왜 앉으라고 한 건지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횡 했다. 무엇을 바랐을까? 과한 영양 섭취와 환경호르몬이 난무하는 시대, 같은 이유로 이 진료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 나의 작은 키와 초경연령을 생각하면 누굴 탓할까 싶어 아이에게 미안했다.      


  항상 어른스러웠던 우리 첫째 솔방울이. 줄줄이 동생들을 돌보느라 너무 빨리 성숙해졌을까 요새는 책에서 나오는 작은 로맨스에도 얼굴이 발그레하던데 그걸 못 보게 해야 하나? 여러 생각이 들었다. 주사 한 방도 무서워하는 아이가 몇 번씩 채혈 검사를 할 수 있을까. 마침 전화가 온 남편에게 검사 결과와 한 달 뒤 피검사를 한다고 했더니. “그래?” 그게 뭐냐는 듯한 대답을 들었다. 그 무던한 성미는 예민하고 복잡한 세상과 항상 한 발 떨어져 있다. 이럴 때면 타고난 성미가 불안한 나는 온 고민을 혼자 짊어진 기분이다. 돌아오며 버스에서 성조숙증과 관련된 정보를 찾았다. 정보는 차고 넘쳤다. 이미 우리 주변에 만연한 일이었다. 검사 수치에 따라 호르몬 주사를 맞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하건 운동과 질 좋은 수면이라고 했다.


  결국 퇴근 후 돌아온 남편에서 한소리를 퍼부었다. 애가 아프다고 하는데 걱정 안 되냐. 별일 아니라고 생각되면 힘들게 검사할 필요도 없다. 초경을 일찍 시작하면 어린애가 뒤처리는 어떻게 할지 걱정도 안 되냐고. 저녁 식사를 챙기며 구겨진 얼굴로 한숨을 쉬는 나에게 고개를 책에 묻고 있던 첫째가 묻는다 “엄마 나 때문에 화났어?” 감추지 못한 불안이 아이에게 전해지는 게 싫었다. 씻고 나온 남편은 두런두런 말을 한다. “그래서 어떻다는 건데? 나는 여자애들이 어떻게 크는지 모르는데 앞뒤 없이 갑자기 말하면 어떻게 알겠냐고.”


  밥을 먹고 핸드폰을 확인하자 아는 언니에게 답이 와 있었다. 몇 년 전 아이의 성장치료를 위해 분기별로 먼 거리의 병원을 오가며 애썼던 언니이다. 아이의 치료는 어땠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어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소식을 전했었다.

 “ 피검사도 하고 힘들지. 병원 예약하고 데려다주고 엄마가 고생이야. 그런데 솔방울도 잘 크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나도 괜히 걱정한 거 같아.”

 별다른 건 없는 무던한 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괜히 걱정한 것 같아.’

내가 첫 출산을 앞두고도 언니는 비슷한 말을 했다. 아이를 낳는 것이 두렵다는 나에게 출산이 견딜만하다 할 수 있다고 했다. 누구나 하는 구구절절한 출산기가 아닌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언니의 말을 믿고 할 수 있다 나를 믿으며, 나는 진통제 없이 건강한 출산을 네 번이나 해냈다.  

 <나도 괜히 걱정한 것 같다>는 무던한 위로가 흥분이 가라앉은 내 마음에 들어왔다. 걱정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기우였다. 흙탕물 같던 마음은 가라앉고 해야 할 일 떠오른다. 아이와 운동하기, 더 일찍 자기, 식단 조절 이런 것들.


  지나치게 복잡하고 섬세한 시대를 사는 나에게 불안을 부채질하지 않는 그녀의 무던한 위로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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