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쌍둥이라니.
날벼락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가장 큰 위기를 느꼈다. 이 아이들을 위해 버둥거리며 사느라 내 삶은 사라지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의 노예로 살아야 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집에서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늘 헝클어져 있고 몸에 살이 붙어서 누가 봐도 아줌마 같은 모습으로 늙어갈 것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돈을 벌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온종일 원치 않는 일을 하며 퇴근하면 집안일을 하는 하루를 영원히 반복할 것이다.
내 삶을 돌아볼 수도 후회할 수도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목의 쇠사슬이 풀릴 것이다. 그 쇠사슬이 풀리고 나면, 나는 이미 늙고 병든 여자가 되어 있겠지.
그런데 뱃속의 아이들이 자랄수록 조금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1순위였지만, 이젠 아이들을 위해 무얼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미래를 다시 계획하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새로운 삶의 활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일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싶은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안락했고 조금은 나태했다.
결혼 전 생활을 돌이켜보면 환경이 나를 강하게 압박할수록 나는 그것을 이겨냈고, 힘들지만 더 많은 결실을 맺었다. 결혼과 안정을 찾은 7년 동안 그걸 잊었을 뿐이었다. 7년은 나의 안식년이었다.
외동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이미 내 인생 설계도 안에 있었다. 아이 하나를 키우면 어떻게든 나는 안식년을 연장했을 것이다.
안식년은 끝났고, 나는 달려야만 한다. 이런 상황이 내게 다시 열심히 살라는 어떤 운명의 계시 같았다.
2.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게 거의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앞으로는 더 그렇겠지. 사는 게 녹록지않고 도전하는 것들은 벽에 부딪칠 것이다.
그런 삶의 진리의 일환으로 나는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
쌍둥이 엄마의 운명을 받아들이자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내 뱃속에 하나가 아닌 둘이 있다는 현실이 인생이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열심히 시도하자. 그렇지만 내 뜻대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받아들이자.
인생이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내 운명을 좌지우지 하다가 어떨 땐 내가 원하는 일을 들어주기도 하고 그런 거다.
이런 생각은 자포자기보다는 깨우침에 가까웠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달라진 시선은 사람들을 대할 때도 영향을 주었다.
인생처럼 사람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저 사람에겐 저 사람의 삶이 있고,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 내게 내 삶이 있고 내가 이런 사람인 것처럼.
시선이 바뀌자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해도 그 사람 특유의 생각과 행동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만나도 오지랖과 상처주는 말을 건네는 대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저 사람이기 때문에 저런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거야. 저게 저 사람의 삶에서 최선이니까. 나의 말과 행동, 삶에 대한 태도가 지금의 내 삶에서 최선이듯이.‘
쌍둥이가 나를 한 뼘 키워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