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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 in Atelier Jan 20. 2023

<성 세바스찬> Mantegna

재난(Catastrophe)은 항상 곁에 머문다_6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 &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7-1569)


사람들은 재앙이 닥쳤을 때 각자가 믿고 의지하는 존재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해부학을 열었던 파도바(Padova)의 근처에 위치한 이조라 디 카르투로(Isola di Carturo)에서 태어났던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는 성 세바스찬(Sebastian)을 화폭에 옮기게 된다. 이 그림은 1347년 겨울 시칠리아로부터 유럽 전역으로 맹위를 떨치며 퍼져나간 흑사병(Black Death)의 대유행과 관련이 있는데, 성 세바스찬에게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Saint Sebastian(1480)_Andrea Mantegna, Tempera & Oil on Canvas, 140x255cm, Louvre


이 그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가 밀라노 칙령(Edictto of Milano, 313년)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며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을 배경으로 한다. 세바스찬은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의 근위장교의 신분으로 기독교를 포교하여 화살로 처형되는 판결에 따라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황제에게 포교를 지속하다가 곤봉으로 태형을 당하여 결국 순교하게 된다. 7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고,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살아난 세바스찬을 치유의 성인으로 숭배하며 흑사병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다. 왜냐하면 신의 분노로 역병을 옮기는 것을 화살로 생각했던 당시의 사람들이 화살로부터 살아난 세바스찬을 치유의 성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흑사병을 치유하는 성인으로 그가 종교화에 자주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 그림도 당시 유행한 전염병의 종식을 축하하기 위해 도시의 포데스타(행정관, Podesta)의 의뢰하에 그려졌다. 만테나는 성 세바스찬을 여러 번 비슷하게 그렸는데, 만테나의 <성 세바스챤(Saint Sebastien, 1480)>은 2021년 코비드-19로 많은 피해를 입은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의 산 제노(Basilica of San Zeno) 제단의 일부였다. 그림에서 파괴된 로마시대의 조각상들은 기독교를 공인하지 않았던 로마의 쇠락을 표현한다. 죽음과 대면한 세바스찬의 일그러진 표정은 하늘로 향하고 있고, 온몸은 화살이 통과해 만신창이가 된 채 코린트(Corinthian) 양식의 기둥에 묶여 있다. 주로 기원전 5세기 무렵에서 4세기까지 유행했던 코린트 양식은 아폴로 에피큐리우스 신전과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기둥에서 볼 수 있는데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된 기둥의 주두를 특징으로 한다. 지중해 지역에서 아칸서스 잎은 소염, 진통제등으로 사용되어 독을 제거하는 식물로 장수와 불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바티칸에 있는 활을 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의술과 역병의 신 아폴로 조각상과 화살에 맞아 죽음에 이르는 성 세바스찬, 그리고 배경의 코린트 양식의 아칸서스 잎의 필연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적 영성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중세시대에 아폴로의 역병의 화살을 피한 기독교 성인의 기적 같은 치유를 통해 벗어나고 싶어 하는 당시 사람들의 소망이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의 특징을 조금 더 살펴보자면, 성 세바스찬은 그리스 조각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라 일컫는 방법의 자세를 취하는데, 콘트라포스토는 신체의 중심을 기점으로 골반과 어깨가 반대로 기울어져 균형 잡힌 자세로 표현되었다. 또한 만테냐는 안료와 용매제인 달걀노른자, 벌꿀, 무화과즙 등을 혼합한 템페라 기법을 사용하여 캔버스에 그리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이런 방법은 맑은 색상을 유지시키고 생생한 색을 만들기는 하지만 색조를 딱딱하게 만들어 톤의 미묘한 변화를 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이와 같은 재료적 특징은 처음부터 회화에 기반을 둔 사람의 그림과 조각에 기반을 둔 그것과는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 것처럼 만테나의 회화가 조각 같은 단단한 느낌을 주는데 결정적인 차이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혹자는 성 세바스찬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화살로 상징되는 남근이 나체인 그의 몸을 관통하는 관음증적 시선인 것처럼 분석하거나 동성애적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중세에 표현된 그림 가운데 나체의 그림이 많이 없기 때문에 남자의 몸이 시선을 끌어서인지, 삶에서 순교로 부활에서 다시 순교로 반복되었던 그의 삶 때문인지, 흑사병의 주기적 유행의 반복으로 인한 역사 때문이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의 고통 속에 환희를 찾는 것은 마조히스트(Masochist)로써 자신을 가학 속에 빠트려 쾌를 갈구하거나, 마약 중독을 합리화하며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 1935-2004)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J'ai bien le droit de me détruire)'고 말한 것처럼 쾌를 주되게 여겨 그림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분석은 그림을 맥락에서 파악하지 않은 오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고통 속에 환희의 반복을 의미하는 주이상스(Jouissance)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신에게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소망이라는 맥락에서 분석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다만, 라캉(Jaques Lacan, 1901-1981)의 입장에서 세바스찬이 무기력하게 묶여있는 상태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얼굴에 표현되었고, 이 고통은 무의식 속에서 종교인들이 가지는 신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자 구원의 충분조건이라는 시각으로 이해한다면 일견 라깡식의 주이상스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쾌라는 시각으로부터 벗어나 철저하게 시대적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소망을 가진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다.


흑사병이 중세를 휩쓸었던 것에 병마를 치유하는 성자로써 성 세바스찬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많이 있는데, 그중에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성 세바스찬>(1610-1614), 바로크적 화풍의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가 매끄러운 인체를 그린 <성 세바스찬>(1630)등도 눈여겨볼 만하다.

St. Sebastian(1610-14), El Groco, 프라도미술관         St. Sebastian(1615-16), Guido Reni, Oil on canvas




다른 측면에서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로 알려진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1527-1569)이 그린 <죽음의 승리(The Triumph of Death)>(1562)도 흑사병의 재앙과 전염병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The Triumph of Death(1562), Pieter Bruegel, 117x162cm, Oil on Panel, Museo del Prado


이 작품의 전면에는 죽음으로 널브러진 시체들, 뼈만 남은 앙상한 개와 말, 해골군단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로 뒤엉켜 있다. 작품의 중간에는 엄청나게 많은 해골 군대들이 점령하고 있고, 물밀듯이 밀려드는 해골 병사들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성이 있으며, 후면에는 끊임없이 밀고 들어오는 해골들과 사람들의 치열한 전투가 묘사되어 있다. 이 죽음의 물결은 1347년 킵차크(Kipchak)의 군대가 몰고 온 페스트의 두려움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의 처절함은 흡사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의 신곡(La Divina Dommedia, 1308-1321)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묘사된 지옥을 보는 듯하다. 특이하게도 오른쪽 하단부의 노래를 부르는 한 쌍의 남녀들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보인다. 마치 인간에게 죽음은 당연하다는 듯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지옥도를 관조한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림은 미카엘 볼케무트(Michael Wolgemut, 1434-1519)의 <죽음의 무도(The Danse Macabre, 1493)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17세기 유행했던 인생무상이라는 주제를 표현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 양식과 연결할 수 있겠다. 흑사병의 대유행 앞에선 모든 생명의 현존하는 사실인 죽음의 불가피성을 말하며, 무력해지는 인간군상들을 표현하는 이 그림은 살아 숨 쉬는 자들의 대표자들을 무덤 주위로 소환하여 속세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일깨우고 있다.

The Danse Macabre(1493), Michael Wolgemut, 46x31.7cm, Prints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놀이로 승화시킨 다양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특별히 지로톤도(Girotondo)라고 불리는 흑사병과 관련된 놀이가 있다. 조르지오 아감벤(Gergio Agamben)은 『세속화 예찬 Profanazioni』(2005)에서 지로톤도를 성스러움을 세속화시켜 흑사병이라는 고통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방브니스트(Emile Benveniste,  1902~1976)를 거론하며, 그는 신화와 의례의 결합을 깨트리는 행위로 놀이의 기능을 말했다. 즉, “루두스 Ludus, 또는 육체적 활동으로서의 놀이는 신화를  벗겨내고 의례를 보존한다. 이오쿠스 jokus, 또는 말장난[농담/익살]으로서의  놀이는 의례를 지우고 신화가 살아남게 한다”라고 하였다. 아감벤은 성스러움이 놀이로 바뀌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환속화(secolarizzazione)를 세속화(propanazione)와 구분하여 “억압의 형식”으로 명명하였으며, 환속화는 힘(권력)이 이쪽으로부터 저쪽으로 이동만 할 뿐 그 힘은 지속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Girotondo(1886), Ettore Tito(1859-1941), Oil on Canvas

Ring-a-ring-a-rosies
A pocket full of posies
A tissue, a tissue
We all fall down

The king has sent his daughter
To fetch a pail of water
A tissue, a tissue
We all fall down

The robin on the steeple
Is singing to the people
A tissue, a tissue
We all fall down

The wedding bells are ringing
The boys and girls are singing
A tissue, a tissue
We all fall down


지로톤도 놀이 방법은 가장 느린 아이가 장미나무가 되어 원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다른 아이들은 주위에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장미의 주의를 돌며 꽃다발 한아름을 주머니에 넣고 재채기를 하며 모두 주저앉게 된다. 가사의 노래와 놀이는 장미가 흑사병에 걸린 환자의 피부에서 발생한 악취를 감추고, 쓰러지고 다시 살아남는 놀이를 통해 어둠과 죽음의 공포를 무화(化)시키는 역할을 한다.



흑사병은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설과, 1347년 몽골의 킵차크(Kipchak)의 군대가 유럽으로 진군하며 페스트 환자의 시신을 저항하던 성의 안쪽에 투석기로 쏘아 보내 성안의 사람들을 전염시켜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원인도 모르고 전염병에 걸려 사나흘, 혹은 일주일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도시마다 인구의 절반에서 많게는 70% 정도까지 피해를 입어 도시는 거대한 무덤으로 변하게 되었다. 특히 1347년부터 1351년 사이에는 2천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고, 유럽은 이 시기를 대역병(Great Plague) 시대로 불렸으며, 유럽에서 전염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18세기 초까지 주기적으로 발병하며 유럽인들을 괴롭혔다. 일면으로 흑사병의 창궐은 중세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했던 종교적 구원의 가치관을 무너뜨리며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하는 인본주의의 부흥의 토양이 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세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온 전염병은 오늘날의 코비드-19라는 팬데믹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변화하고 있다. 특히 기후 위기를 마주한 인류는 동토에 숨겨진 이름 모를 다양한 병균들과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중세 시대에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구원을 요청했다면, 자연의 경고 앞에서 겸허하게 이기심을 버리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중대한 결정과 실천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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