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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e Oct 11. 2022

창조적 영감을 인간에게 찰나의 속삭임으로 나누어준 이유

feat 한계점

전혀 새로운 창조는
대개 주어진 한계를 적극적으로 껴안고
활용한 흔적이
그 배경에 있다.
 
그 한계점이
곧 예술가의 시야가 넓어지는 순간임을
그는 경험한 것이다.
 
새로운 시선을 통해서는 나를 다시 보고,
새로운 시점을 통해서는 당신을 다시 보고,
새로운 시야를 통해서는 세상을 다시 본다.

김소연 / 시옷의 세계 中

글귀가 하나 더 남아 있었네요.

나중에 발견한 글귀는 책장 밑으로 숨어버렸다가 다시 발견한 소중한 반지와 같은 반가움이 있습니다.

그럼 그 안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다시 돌아왔을까요?


창조의 '영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창조적 '영감'을 어떻게 받을까요?

그 '영감'이 오지 않아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날에 과음해서, 잠을 푹 못 자서, 날이 흐려서, 컨디션이 별로여서, 배가 고파서, 사랑이 고파서, 근래에 책을 읽지 못해서, 회의가 길어서, 신선한 바깥공기를 쐬지 못해서...

갖가지 이유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기획서를 완성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창조의 '영감'은 바로 '한계'에서 오는 것이었더라고요.

더 이상 구할 때가 없고, 만들 수가 없고, 따라 할 것이 없을 때, 인간은 드디어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바로 '창조'라고 부른다지요.


이 '창조'야 말로 오늘날 인간을 동물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한 원천입니다.

프로세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번개로부터 속이 빈 회향나무속에 몰래 불씨를 숨겨 인간에게 건네준 이후,

인간은 또 한 번 신의 것을 탐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절대 영역인 '창조'의 능력입니다.


인간은 음악을, 미술을, 그리고 글을 짓는데 '창조력'이 없어서 신을 찬양하는 노래와 작품과 시를 만들 수 없다고 신에게 하소연하게 됩니다. 신은 인간의 이러한 하소연을 듣고 좀 더 나은 인간의 노래와 작품과 시를 듣기 위해 신의 창조력을 조금 나누어 주기로 하지요.


그러나 인간은 신의 이러한 창조의 힘을 머릿속에 갖게 될 경우 감당치 못하고 미쳐버리기 때문에, 신은 인간에게 아주 찰나만 이 능력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창조력이 인간에게 불현듯 아주 잠시 떠오르는 것을 '영감'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요? 네, 제가 그 신의 창조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잠시 영감을 떠올려 지어낸 이야기 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창조력이 특히 발휘되는 것은 예술의 세계입니다. 미술과 음악과 글의 세계는 원래 신에게 헌사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창조라는 영감으로 가득 찬 세계지요.


그러므로 창조라는 영감의 세계는 열심히 오래 생각한다고 해서 떠오르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고요한 아침의 소리에서, 화장실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길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시 산책을 나간 즈음, 사모하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전율을 느낄 때, 바로 번뜩!, 제우스의 번개와 같이 창조의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은 창조적 인재를 우대한다고 하면서 막상 '영감'의 세계를 믿지는 않지요. 이 '영감'의 신화는 단순히 제가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쉬는 것, 이야기하는 것, 산책하는 것, 사랑하는 커피 마시는 것을 불필요하거나 시간낭비라고 하며 그냥 열심히 쉬지 말고 움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창조의 영감은 신과의 소통, 그 잠깐의 순간에 '퍼버벅!' 오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 이만 알 수 있습니다. 그 찰나의 신의 속삭임 말이에요.


오늘의 당신의 글에는 창조적 '영감'이 떠올랐나요?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좀 더 쉬고, 이야기하고, 산책하고, 사랑하고, 커피를 한잔 더 하고,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번뜩하고 스치는 신의 '영감'이라는 속삭임을 말이지요.

"들리나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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