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마다

나는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by 빛의투영

낮부터 오락가락 내리던 비는 밤이 되자 지붕 위로 굵은 빗방울을 들이붓는다.

습한 날씨처럼 몸도 물에 젖은 솜뭉치 같다.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영부영 하루를 보내기 딱 좋을 날씨다.

이불 밖은 위험해 같은. 회사에 다닐 때는 긴 연휴가 참 좋았는데 지금은 평일과 다름 없어졌다.


금, 토 치유농업사 양성과정을 시작하고 나는 월 화 수 목 금 금 금이 되었다.

하루도 비는 날이 없지만 나름의 틈을 찾으면 여유는 생기는 법이다.

4번째 강의를 들으러 가다 보니 경상대학교의 지리를 조금씩 익혀간다. 고작 가는 곳이라고는 강의 듣는 동과

밥 먹으러 가는 교수님 전용 식당뿐이지만. 식당과 강의 동은 한 참 떨어져 있었다.

캠퍼스를 거닐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밥 먹고 냅다 뛰어서 강의 시간을 맞춰야 했다.

차를 타고 갈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그러기에는 좀 애매한 거리다.

금, 토 몰아서 14~16시간의 수강을 해야 했다. 공부하러 왔으니 공부만 해야 하는 것이 맞긴 하다.


어느새 나무들은 싱그러운 여름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다. 어디를 봐도 초록색의 여린 잎들로 무성해졌다.

내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0분 남짓이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여유 같은 거다. 멀리서 오시는 분은 1시간 반에서 2시간이 걸린 다고 했다.

집에서 15분이면 올 수 있어서 운이 꽤나 좋다고 생각한다.


두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켜 주는 금요일에는 아침부터 분주하다.

농사 일로 그을린 얼굴에 기미 잡티가 한가득이다. 맨 얼굴로 수업을 가는 것이 좀 부끄러워졌다.

강의 첫날에는 신경을 쓰고 갔다. 어디든 교육을 가보면 첫날에는 항상 단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진은 홍보용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기본은 해줘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진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본인은 그게 잘 보인다.


친화력이 약한 나는 인사 잘하기 스킬을 시전 해보기로 했다.

웃는 얼굴을 장착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일찍 도착했지만 사람들이 어느 정도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강의 실로 들어갔다. 눈이 나쁜 관계로 앞쪽을 선호했다.

너무 정면에 앉으면 교수님과 아이컨택을 하면서 강의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오른쪽 벽 앞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앞뒤로 두 분이 좋아 보여서 인사를 하면서 안면 트기를 했다.

다행히 너무 좋은 분들이 셔서 밥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다.

자리 선택의 오류가 있었다. 하필 교수님의 강단이 왼쪽에 있어서 대각선으로 정면이 된다.

강제 아이컨택이 시도된다. 너무 부담스러워서 앞쪽 대형 스크린을 쳐다보지 못하고 패드로 수업 자료를

보게 되었다. 강의 자료를 미리 공유해 주시기 때문에 다운로드하여 두었다.

눈이 마주치면 질문을 많이 받는다. 식량 안보 기능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동안 나는 머릿속에서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쌀농사도 못 짓게 하면서 식량 공급의 기능을 농업에서 어떻게 책임 지라는 거야'

라고 말이다. 눈이 마주치면 질문할 때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지도 몰라서 필사적으로 생각을 지워내야

했다. 쓸 때 없는 말로 교수님의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되니까.

진도를 나갈 때마다 종종 태클을 걸고 싶은 대목이 많아진다. 농업의 현실이라는 것이 지금은 좀 암담한 편이다. 그래서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고 다른 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1차 산업인 농업 생산을 멈추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윤 추구를 위해 더 좋은 방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앉아서 집중하기는 쉽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음성녹음을 해서 일하는 동안 라디오 대신 듣고 있는 중이다. 교수님 마다 스타일이 달라서 귀에 잘 꽂히는 분이 있고 수면 유도를 하시는 차분하고 조근 조근 하신 분이 계신다. 아직은 견딜만하다.

이 분위기가 많이 익숙해지고 더위가 찾아오면 위기가 올 것 같다.


세 권 중에서 1권이 끝이 났다. 이 번주 금요일에 가면 쪽지 시험을 본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날 결석 하고 싶다고 했다. 30분은 그냥 풀고 1시간 반은 오픈 북이라고 하자. 안색이 밝아졌다.

성적에 반영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서 크게 지장이 없음에도 학교 다닐 때의 감정이 되살아 난다.

외워야 하는 것이 정말 많다. 법률에서 고작 2문제 나온다고 했는데 뭔 법이 3장이다. 숫자를 바꾸기도 한다는데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하는 생각에 외워 보기로 했다.


작년에 시험에 합격한 분이 책 필사를 여러 번 하고 예습 복습을 많이 했다고 말해 주었다.

어제부터 과목당 요약정리를 시작했다. 1권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 같다.

책과 PPT 자료를 취합하고 녹음 강의를 들으면서 쉽게 설명해 준 것들을 보충하니 하루가 짧다.

눈이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눈 영양제도 먹기 시작했다. 나도 챙겨 가면서 긴 호흡으로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틈틈이 스트레칭도 해주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널고 매 끼니마다 식사를 준비해야 하지만 늘 하던 것이라서 요령이 생겼다.


이 번 연도에 1차 2차 시험을 합격하고 즐거운 연말을 맞이하는 상상을 한다.

내 년에 큰 아이가 고3이다. 특별하게 뭔가를 해주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신경도 써주고 싶고 응원도 하고

싶으니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본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나를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도전은 나이가 중요한 거 같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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