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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OO 생활

일상 一想

by 조은영 GoodSpirit

시댁에 가면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보통 명절에 먹을 음식만 준비한다. 그래도 반나절은 꼬박 걸린다. 깻잎전, 고추전, 고기산적, 대구전, 잡채, 갈비를 하는데 세 며느리들과 손녀 다섯, 손자 셋이 역할을 나누어 재료준비를 하고 전을 부친다. 성인 남성 중 막내아들인 남편만 명절노동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밖에 매 끼니 식사준비와 정리 및 설거지는 주로 세 며느리몫이다. 모든 일이 여성에게는 의무이고 남성에게는 선택인 분위기이다.


반면 딸 넷인 친정 분위기는 좀 다르다. 딸, 사위, 손자손녀, 할 것 없이 먹고사는 집안일은 의무이다. 이번 설에 우리 가족은 엄마를 모시고 지난해 속초로 이사 한 동생네에서 5박 6일을 보냈다. 동생네는 시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설에 시댁에 모이지 않기에 나는 이번 설은 시부모님께 양해를 구하고 한주 전에 시댁에 먼저 다녀왔다.


그렇게 우리 가족 6인, 동생네 3인, 엄마까지 10인이 모였다. 한두 사람이 매끼 식사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지기엔 부담되는 인원이다. 어떻게 하면 슬기로운 명절 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름하여 "명절 한 끼 프로젝트!"


이번 겨울, 방학 중인 4명의 아이들에게 점심까지 삼시 세 끼를 해주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아들 둘은 나보다 두세 배는 더 먹는다. 그래서 중고등학생 세 자녀에게 매주 한 번은 점심이든 저녁이든 가족을 위해 음식 한 가지를 준비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아이들은 수용했다. 초 6이 되는 막내는 보조로 도움을 주었다. 아이들은 계란찜, 돈가스, 순대볶음, 삼겹살&대패 삼겹살 굽기 등 쉽게 할 수 있는 음식을 조리했다.


실습을 통해 준비된 아이들은 거부감 없이 "명절 한 끼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우리는 2명씩 4팀을 짜고 각 팀은 하고 싶은 음식을 정해 함께 장을 봤다. 24일 금요일 저녁에 도착한 우리를 위해 동생이 식사를 준비했고 아침에 먹는 빵을 만들기 때문에 동생은 열외 시켰다. 각 식사조는 요리, 상 차리기, 설거지까지 전 과정을 책임졌으므로 다른 팀은 식사 준비에 마음을 쓰지 않고 집 근처 영랑호 산책을 한다든가, 보드게임, 독서, 낮잠 등 편하게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명절 한 끼 프로젝트 일정표>


25일 아침 통밀빵/점심 외식/저녁 잡채(친정엄마&아들1)


26일 아침 통밀빵/점심 오리주물럭(남편&딸3)/저녁 김밥(제부&아들2)


27일 아침 통밀빵/점심 외식/저녁 대패삼겹살 채소볶음(나&딸4)


28일 아침 호박죽(27일 저녁 모두 함께 준비)/점심 외식/저녁 굴떡국(나&아들1)


29일 아침 호박죽


29일은 길이 막힐 것을 우려하여 아침 일찍 출발하느라 식사가 끝나는 대로 자기 그릇은 자기가 씻었다. 이번 명절 연휴는 내게 참 편안했다. 일단 별도로 명절 음식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기름진 음식을 과도하게 먹는 일이 없어서 속이 편안했다. 또한 여유시간이 많았으므로 평상시에 하던 일들인 산책, 독서, 낮잠, 글쓰기 등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가를 보내기 위해 하는 일들인 보드게임, 가족 활동들을 매일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가족구성원들이 수평관계일 때 가능하다. 부모님 세대와의 수평구조가 어렵다면 일단 내 가정에서 시작해보자. 가사를 전혀 하지 않는 남편이라면 동의하고 싶지 않겠지만 아내와 자녀들과 협력하여 하나둘씩 가사에 동참한다면, 결국 모두에게 이로운 슬기로운 명절생활에 이어 슬기로운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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