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내적 동기가 필요하다
2025년 11월 3일 새벽 6시, 초급 수영강습반을 시작했다. 연월일시까지 기록하는 이유는 나에게는 쾌나 역사적인 사건, 그러니까 초급반만 4번째 등록한 첫 강습일이기 때문이다. 1번째 등록은 20대 중후반,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일이다.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뭐 재미있는 거 없나, 수영이나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했다. 영화나 광고 속 수영복을 입고 바다수영을 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이상적 젊은이의 초상 같았다. 한데, 현실 수영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에 '음~ 파!' 호흡은 쉬워 보였다. 발차기도 따로 하면 괜찮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같이 하면 엇박자가 났다. 빠른 들숨 '파!'에서 자꾸 물을 먹었다. 1번 레인 이 끝에서 저 끝, 25미터가 영원처럼 길었다. 중간에 서기를 몇 번... 너무 힘들었다. 물 밖에 나오면 힘이 쭉 빠졌다. 한 1~2주 갔나?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도 힘들고, 그만 둘 핑계가 많았다.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힘들기만 하니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그리고 1~2년 후, 워터파크에 함께 놀러 간 친구들이 수영을 한다기에 나만 못하는구나를 다시 한번 깨닫고 한번 더 도전해 보자 하는 마음에 새벽반을 또 등록했다. 아침형 인간도 아니면서 새벽반을 어떻게 감당할까 고민하기보단 한번 해봤으니까 좀 낫겠지 하는 막연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서 다시 등록했다. 뭐 그런대로 킥판을 붙잡고 나름 호흡하는 흉내를 내면서 1번 레인 끝을 향해 발차기를 하면서 나아갔으나 언제나 끝에 닿지 못하고 중간쯤에 멈추어 가쁜 숨 고르기를 해야 했다. 초급반을 같이 시작한 초보들이 하나둘씩 키판없이도 1번 레인 끝까지 나아갈 수 있는데 나는 호흡이 안 되니 엄두가 안 났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안 되는 게 있구나. 같은 노력을 해도 누군가는 어떤 것을 더 잘하고 더 못 하고 차이가 나는구나. 나는 수영을 남들보다 더 못하는구나. 그 생각이 드니까 하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졌다. 때마침 아침기온도 뚝 떨어져 수영장이 더 추워졌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이제 수영은 물 건너갔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결혼하고 셋째 아이를 낳고 공동육아를 위해 남편이 1년 육아휴직을 하고 시댁이 있는 화순으로 이주했다.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뭔가를 함께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번뜩 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수영을 배워놓으면 좋겠다 싶어서 옛일은 잊고 또다시 3번째 초급반에 등록했다. 오전에 셋째를 잠깐 아파트단지 어린이집에 맡기고 그렇게 남편과 함께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3번째 도전이라 아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나름 하는 축에 들었다. '음~ 파!'와 발차기를 뗄 때까지는 그랬다. 그 다음부터는 여전히 나는 느렸고 같이 배워도 몸에 익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다. 남편 역시 느린지라 서로 위로가 된달까. 같이 배우니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자유영과 배영은 익힐 수 있었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우리는 2012년 1월 매우 추운 어느 날, 남편의 새로운 발령지인 강원도 영월로 이사를 했다. 셋째를 잠깐이라도 맡길 만한 마음에 드는 어린이집은 찾지 못해서 4세가 되어서야 보냈다. 그리고 넷째가 태어났다. 내가 언제 수영을 했던가. 수영의 세계는 그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물놀이에서는 말 그대로 물에서 노는 일이라 수영의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움이 없었다.
그러다 작년 10월 나 홀로 제주여행에서 곽지해변을 걷다가 서핑을 배우는 사람들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두근거렸다. 바다에 뛰어들어 파도를 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영을 못해도 서핑을 배울 수는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영을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2~3년 후, 제주살이에서 하고싶은 일 목록들을 하나둘 기록해 보았다. 서핑뿐 아니라 프리다이빙, 해녀학교, 소형선박조종사 등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는데 모두 바다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다를 빼고서 어떻게 제주를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 보지 않고서 어떻게 진짜 바다를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수영은 해보는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노는 수준으로 배워야 한다.
힘든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려면 왜 시작했는지에 대한 동기가 확실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부여된 동기는 끝까지 갈 원동력을 주지 못한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끌어올려진 분명한 내적 동기가 있어야만 힘든 장애물을 만났을 때 뛰어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나는 오늘도 주저 없이 4번째 초급반 1번 레인으로 뛰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