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장구치는 법, 아홉 번째
20241209 짧은 소설 9회차
물장구치는 법, 아홉 번째
"그 안에서 스쳐 지나는 물결의 소리를 조용히 들어보자."
수현이 떠나고 난 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건넜던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몇 번이나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뀌었고,
주변의 자동차 소음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 맴돌았다.
'멀리 떠났어요... 하늘나라로.'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 그리고 잠시 흔들리던 눈빛.
모든 게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이제 내 발걸음은 좁고 어둑한 원룸을 향하고 있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불을 끄고 천장을 바라보면서
자꾸만 그녀의 얼굴과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수현은 왜 그날 나와 함께 수영장에 갔을까?
왜 처음 만난 나에게 자신의 상처를 내비쳤을까?
그녀는 무엇을 원했을까?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보내고,
나는 문득 그녀가 말했던 미용실이 떠올랐다.
'언덕 건너 미용실'이라는 짧은 단서였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상하게도 나를 붙잡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다는 마음과
단순한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 주말, 나는 미용실을 찾기로 했다.
언덕 건너라는 말만 믿고 동네를 헤매며 걸어 다녔다.
한참을 걸었을 때, 작고 아담한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수현 헤어'.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이름이었다.
나는 잠시 주저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나를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여긴 웬일이에요? 머리 자르러 온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냥, 말했던 미용실이 궁금해서요.
그리고 머리도 자를 겸.”
그녀는 내게 의자를 권했다.
나는 그녀의 손길이 닿는 동안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듯했지만,
눈가에 남은 짙은 그림자가 보였다.
수영장에서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미용실, 오래 하셨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꽤 됐어요. 한 10년 넘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그냥... 시작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더 묻지 못했다.
그녀가 다 말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억지로 캐물을 용기는 없었다.
대신 나는 그녀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머리를 다 자르고 미용실을 나설 때,
그녀는 내게 작게 말했다.
“혹시... 커피 좋아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작은 종이컵 두 개에 커피를 따라 내게 내밀었다.
“이거 한 잔 하고 가요. 저도 잠깐 쉴 겸.”
우리는 미용실 앞 작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햇살이 따뜻했고, 바람이 선선했다.
그녀는 컵을 손에 쥐고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딸아이도 이 커피를 참 좋아했어요.
같이 마시던 게 마지막이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가늘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깊고도 무거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든 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수현이 나에게 보여준 건
단순한 친절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고,
누군가가 들어주길 원하고 있었다.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녀가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옆에 있어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주말마다 그녀의 미용실을 찾기 시작했다.
머리를 자르지 않아도, 그냥 들러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점점 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과의 추억, 그 딸을 잃고 난 후의 삶,
그리고 다시 살아가려 애쓰는 지금의 하루하루.
어느 날 그녀는 말했다.
“가끔은요,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힘이 생기더라고요. 고마워요, 이렇게 와줘서.”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고맙죠. 이렇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요.”
그날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의 아픔은 완전히 치유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걸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조금씩 변해갔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를 통해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삶 속에서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