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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숙경 Jun 09. 2022

음악의 선율과 회화의 선

회화 말고 다른 영역에서 선은 점보다 훨씬 더 많이 쓰이고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음악은 칸딘스키에게 각별한 만큼 음악 속에서의 선은 어떠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음악적인 선, 요컨대 멜로디를 띤 선이 무얼 말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런 표현은 종종 쓰이니까요. 알다시피 음악의 재료는 무엇보다도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칸딘스키는 회화의 선으로 본 거죠. 악기 소리의 어우러짐은 그에게 찬란한 콤포지션이고 완성된 회화 작품이나 진배없었던 것입니다. 


피아노를 점의 악기라고 가정한다면 선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악기는 파이프오르간이라고 칸딘스키는 거침없이 말하죠. 소리를 떠올리며 점과 선을 매치해 보면 그의 시선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음악에서 선이 어떻게 표현 수단이 된다는 걸까요? 음악에는 강세를 지시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티시모에 이르기까지 소리의 강약을 수시로 변경하며 적시해 놓지요. 칸딘스키는 이를 선의 예리함과 농담의 정도에 적용시킨 겁니다. 


소리는 음높이는 물론이고 음의 광폭까지 지니고 있어 그 표현력이 막강합니다. 다양한 악기의 제각기 다른 소리는 이를 뒷받침하는 일등공신이고요. 이러한 매력이 회화의 선과 닮았다는 게 칸딘스키의 생각이에요. 따라서 가장 가느다란 선은 바이올린과 플루트와 피콜로가 만들어내고, 좀 더 굵은 선은 비올라와 클라리넷이 제공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저음의 악기를 거쳐 점점 더 폭이 넓은 선이 표출되는데 이는 콘트라베이스나 튜바의 가장 낮은 소리가 맡게 됩니다. 


선에는 굵기만 있는 게 아니라 색조도 있어요. 악기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악기에는 저마다의 소리가 있고 이를 음색이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러니 소리와 색의 짝짓기는 쉽게 수긍이 되는 어색하지 않은 일입니다. 


통상 음악을 나타내는 것은 오선지와 음표들이에요. 이 일반적인 악보를 칸딘스키 식으로 들여다볼까요. 음악에서 시간은 음표로 나타나는데 검정과 하양만 허용하는 색채의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머리에 드리워진 색과 꼬리의 수로 알 수 있습니다. 음의 높낮이도 선으로 측정되는데 이때 다섯 개의 수평선이 기본 바탕이 됩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청각적 울림의 현상을 이렇게 분명한 언어로 우리 눈에 전달하고 있는 이 특별한 표현 수단의 단순함과 간결함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남긴다는 게 칸딘스키의 악보 대한 평가입니다. 


여기에 한술 더해서 손으로 현악기의 활을 누르는 압력이 그림 그릴 때 연필을 누르는 손의 압력과 같다는 발상까지 합하면 칸딘스키의 음악에 대한 애착은 가공할 만하죠.   


무용에는, 특히 전위 무용의 춤사위에는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분명한 의도가 실리게 되고, 현대 무용가는 무대 위에서 정확한 선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선명한 선이 공간을 가르며 그림을 그려 놓지만 이내 사라지고 곧바로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지지요. 


그러므로 칸딘스키는 무용에서도 선은 콤포지션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라고 합니다. 무용가는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 이르기까지 몸 전체를 매개로 매 순간 끊임없이 선의 콤포지션을 완성한다는 겁니다. 무용에서 선적인 동작은 새로운 성과이긴 하지만 현대 무용의 창안은 아닙니다. 고전 발레도 그렇고, 모든 민족에게는 그들의 발전 단계에 걸맞은 춤이 있고 이를 표현하는 개별적인 선을 가지고 있다는 칸딘스키의 설명입니다.


조각과 건축에서는 선의 역할과 의미를 위하여 구태여 입증자료를 찾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공간 구성이 곧 선의 구성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므로 칸딘스키는 오히려 이 영역에서는 여러 민족과 각 시대를 상대로 전형적인 작품들을 추려내고 여기에서 주류를 이루는 선을 순수한 그래픽적 표현으로 정리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합니다. 그는 이 작업으로 건축술에 맡겨진 선의 운명, 각 시대별로 세워지는 그래픽 공식, 그리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분위기가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것도 확인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고 있어요.


칸딘스키는 이 연구의 마지막은 대기권을 장악하고 있는 수평선과 수직선의 관찰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특이한 주장을 해요. 그건 당시 새롭게 부각되는 현대식 건축의 영향이라고 생각해요. 당시에 건축자료와 건축기술이 더 많은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었고, 수평선과 수직선을 강조하느냐 안 하느냐는 건축 원칙으로 등장했으니까요. 이 흐름의 중심에 바우하우스가 있었고 칸딘스키 역시 이곳의 교수였음을 생각하면 그의 주장은 합당해 보입니다. 


문학에서 시는 규칙적으로 교체되는 운율을 통하여 리듬감이나 통일성 등 목표한 바를 이룹니다. 이 운율이 칸딘스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의 형상으로 다가옵니다. 직선이나 곡선의 그래픽으로 대체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운율은 선으로 둔갑할 수 있는 거지요. 그의 설명을 더 살펴볼까요?


시에서는 글귀 끝부분마다 각운을 달아 놓기도 하는데 이를 낭독한다면 일종의 음악적 멜로디가 있는 선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 선은 상승과 하락, 긴장과 해소 등 변화무쌍한 형태로 표출되지만 문학적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됩니다. 한편 낭송은 음악에서 연주가의 재량에 따라 다른 울림이 연주되듯 낭송자의 재량에 맡겨지지요. 


이러한 칸딘스키의 문학적 관점은 추상 예술의 본질을 논하는 것으로 이어져요. 그의 주장은 언제나 추상이 구상보다 더 완벽한 형태를 구사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또 그렇게 실행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고요. 왜냐면 순수 형태의 문제가 추상예술에서는 본질이지만 구상 예술에서는 부수적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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