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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차 Sep 08. 2024

가족 해외여행을 가다. 아빠 환갑 기념으로

딸 두 명 데리고 해외여행 가기

부모님께 늘 좋은 말만 하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는 내 인생에 좋은 일이 크게 없었다. 그래서 전할말이 없었다. 대화가 없어지니 사이는 금방 소원해졌다. 고향에도 거의 가지 않았다. 고향에 가는 것이 나에겐 큰 인내를 필요로 했고, 그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나를 보채는 엄마, 그런 엄마를 보호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아빠가 미웠다. 20여 년간 해온 착한 딸 노릇에 내 인내심은 바닥나고 있었다. 우울증 치료를 위한 상담을 받으면 필연적으로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부족한 어린 시절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조금씩 부모님을 향한 원망이 피어올랐다.

 "왜 안 내려오니?", "언제 내려오니?", "이번에도 안 오니?" 하는 어머니의 물음은 늘 나를 무겁게 눌렀다. 그 말 들이 너무 무거웠지만, 그래도 가지 않는 것이 내편에선 훨씬 편했다.




우울증 치료 초창기 때는 오히려 상태가 나빠지기만 했다. 사람은 더 만나기 싫어졌고, 몰랐던 무기력함을 알게 되니 더욱 무기력했다. 계속해서 상태가 나빠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몇 개월간 포기하지 않고 치료를 하다 보니 괜찮아지는 때가 왔다. 조금이지만 기력을 회복하니 미뤄놨던 일을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에도 내려갔다. 집은 이사를 해 이전에 내가 더 이상 내가 살던 집이 아니었다. 완전히 낯선 공간이었다. 식사를 하며 아버지 환갑을 기념해 해외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대학생이던 때, 내가 계획해 가족 여행을 대만으로 간 적이 있다. 부모님은 그때의 기억이 퍽 좋으셨나 보다. 나는 분명 내키지 않았다. 우리 집이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면 A부터 Z까지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야 할 것이 뻔했다. 나에겐 너무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나는 고향만 내려가면 착한 딸 증후군처럼 좋은 딸인 척을 하게 된다. 관성적으로 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찾아보고 있었다. 중학생의 나이를 지날 때 나는 엄마를 이미 딸처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언니가 경계선 지능인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대체 여행을 가겠단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다. 피가 섞인다는 게 참 무섭기도 하지.




여행을 위해 며칠 일찍 내려가 짐을 쌌다. 부모님과 나 세명만 있는 시간이었다. 이전에도 부모님은 나에게 언니에 대한 걱정을 종종 말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부모님은 힘든 일은 공유해야 한다며 집안 문제를 나에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너무나도 답답했다. 부모인데, 본인의 자식인데 자식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경계선 지능인인 언니에게 그 사실을 모르고 계속해서 챌린지를 요구했다. 당시에는 잠깐이나마 언니가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언니는 부모님의 기대만큼 살아낼 수 없다. 나는 그걸 알았다. 부모님이 기대를 내려놓지 않으면 모두가 불행해질 뿐이었다. 언니의 험담 아닌 험담을 듣다, 언니가 전형적인 경계선 지능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말했다. 최근에 본 다큐 이야기를 꺼내며 "언니. 경계선 지능인이잖아."라고 말했다. 다큐에서 봤던 특징을 몇 가지 말하니 부모님은 크게 공감했다. 살짝 흥분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 감정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동안 말로는 누구에게도 설명 못했던 언니 문제의 원인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개운함. 그리고 이내 느껴지는 무력함.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부모님도 나와 같겠지.




가족이 모이면 늘 언니를 나무라는 일이 생겼다. 부모님은 언니의 행실에 대해 늘 지적했다.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나도 언니는 고쳐지지 않았다. 지적을 들어도 언니는 금방 기분이 풀렸다. 화가 덜 풀린 부모님은 조잘 대는 언니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번 여행은 언니를 나무라지 않은 최초의 여행이었다. 모두가 언니에게 친절했다. 부모님도 그들 나름의 생각이 많으셨으리라. 나는 나만 알고 있던 문제를 누군가 같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또 원인을 알았으니 앞으로 부모님이 언니를 잘 케어하겠지 하는 기대가 생겼다. 사실 언니가 경계선지능인임을 알았을 때 너무 막막했거든. 내 막막함을 덜어내고 싶어서 부모님이 잘하시겠지 하고 생각해 넘겨버렸다.




언니에겐 좋은 여행이 되었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여행 내내 지옥 같았다.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고 해내야 했다. 와중에 언니와 엄마는 아이처럼 불평하기도 했다. 낳은 적도 없는 자식을 두 명 데리고 해외여행을 하고 있다니, 스스로를 이런 상황에 빠뜨린 내가 미웠다.

언니가 경지인임을 머리로 아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너무 답답했지만 뭐라 할 수 없어 괴로웠다. 또 의식을 하고 보니 그동안 그 사실을 몰랐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언니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날 숙소값 인출을 위해 숙소 근처에 ATM에 아빠와 함께 가게 되었다. 아빠는 나의 말을 듣고 언니가 경지인임을 처음 의심해 봤다고 했다. 여행 출발 전 며칠간 마음이 안 좋았다고 했다. 그동안 자식을 너무 모르고 몰아붙이기만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같은 자식이지만 깨물어서 더 아프고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며 덧 붙였다. 그래서 너는 거의 손 안 대고 키운 것 같다며 말했다. 나는 덜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게 당시의 나에겐 상처가 되었다. 언니가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아빠의 말이 이해가 됐다. 결국엔 아빠를 이해해야 하고야 마는 내가 제일 싫었다.




여행 내내 아이같이 굴던 엄마, 실제로 아이 같은 언니. 그들의 케어를 나의 몫으로 넘기는 아빠. 이번 여행은 그간 내 인생의 집약체였다. 그동안 나의 고생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여행을 계기로 나는 가족들과 거리를 두려 했다. '이기적으로 생각하자.' '가족이 없는 사람처럼 살자.' 

굳게 다짐했다. 종종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엔 늘 원망이 서려있었지만, 그 원망만 견뎌내면 그만이었다.

이때만 해도 '아 가족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겠지. 이제 내 치료에 전념해야겠다' 생각했다.

일 년 후, 이때 가족문제를 무시한 벌을 무겁게 받게 될 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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