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에도 장점이 있다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고 우울이 너무 미웠다. 나는 원한적도 없는데 자꾸 찾아와서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울의 기능이 있다. 적당한 우울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차분히 생각하게 한다.
‘나는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은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래서 우울은 꼭 필요한 감정이다. 밉지만 곁에 두고 잘 관리하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까다로운 녀석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우울도 좋은 점이 있다.
내가 상담받을 때 어려워 하는 것 중 하나는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상담을 받을 때 매번 말문을 막는 질문이 있었다.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질문을 들으면 머리가 하얘졌다. 기억 날듯 말듯한 냄새를 기억해 내는 것 같았다.
스쳐가는 감각은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정적이 불편했다. 시계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선생님 머리 뒤에 있는 책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좋다, 싫다 중에 고르면요?”
선생님은 나를 기다려주고, 감정을 선택지로 제시해 주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자세한 나의 상태를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의 선택지를 통해 감정을 배워간다. 걸음마 떼듯이. 차근차근
내 감정을 알게 되니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언제 외로운지, 어떤 상황을 힘들어하는지
내 마음을 자극하는 것은 뭔지, 누가 나를 화나게 하는지 등등
나를 더 잘 알게 되어서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내가 힘든 상태인지도 모르고 나를 다그쳤는데
이제는 내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쉬어간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게 되니,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겪은 상황이 달라도 비슷한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별다른 말 없이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때때로 힘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런 말들에 나도 힘을 받았다. 이렇게 사는 건가 싶었다.
아껴서 읽던 편지가 있다. 내 생일날 받은 편지이다.
그 편지에는 내가 그 친구에 물어봤던 질문에 대한 답이 적혀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 게 있을까?”
그 애는 본인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 건 본인이라고.
그 애 다운 발상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 애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 애를 알아가는 게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나를 좋아하게 될까?’
그래서 그 편지를 죽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었다. 그 얘의 말에 속아서 그냥 살아보려고.
상담을 받으며 나의 감정을 말로 표현해 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전보다 나를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나에 대한 정보들이 하나씩 쌓여 간다.
나를 좋아하려면 나에 대해 잘 알아야 하구나. 그 편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나에 대해 전혀 몰랐을 것이다.
또, 그 친구의 편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을 이해 못 하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을 수도.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
우울증에 걸려서 불행하기만 한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