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동지는 남측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는데 놀라운 건 하버드대를 나온 어느 젊은 정치인의 이름 세 글자가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는 것이다. 여의도 국회에 원피스를 입고 와 논란이 됐던 한 여성 정치인의 이름도 알고 있는 그였다.
"혹시 알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웃는다. 내가 아는 건 없었다. 아는 게 있다면 그들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을 거라는 것.
취기가 오른 건지 그 얼굴을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럼에도 난 안다. 그들은 때가 되면 싸운다는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을 보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선거철이 되면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기까지 하며, 그건 미치도록 서글픈 전투다. 곧 피를 흘리게 될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의식을 치르듯이.
어느 정치인은 큰 바위 위에서 스스로를 아래로 떨어뜨려 운명을 맞이하고야 만다. 그는 그 모습을 기억한다 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손 잡던 그를 그 장면을 말이다.
누군가가 입력해놓은 글자들처럼, 마치 책 한 권을 읽은 듯 이젠 잊지 않기 위해 그걸 새겨두는 지도.
내가 김영철 동지 정도를 알고 있던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난 그를 1미터 거리에서 서로 마주 봤을 때, 그리고 악수했을 때 반쯤 믿지 못했다. 그의 한쪽 손은 내 손을 쥐고 있었지만 내 오른손은 그의 손을 쥐지 못한다. 공산당의 2인자, 남쪽 언론에서는 온건파로 분류되곤 하던 그 인물이.
동시에 위원장이 견제하는 자이기도 했던. 내 진심은 반가움에 가까웠지만 그걸 표할 수 없었다. 그 손이 당을 쥐어흔들 줄 아는 인물의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뿌리칠 수 없을 듯했다.
그는 누구도 주시하지 않았으며, 무엇도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았고, 그 눈은 꼭 모든 게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 속 물체들을 보는 듯했다.
"제게는 차가운 눈을 가진 자들이 필요합니다."
김영철 동지는 늘 검은 테의 안경을 끼고 다녔다.
"라 부장은 어떤가요?"
넌지시 그 이름을 말하는 그였는데.
그는 말수가 적고, 그렇지만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틈을 주지 않고 말하는. 늘 화장품 냄새를 풍기고 다니며, 하지만 내가 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지.
마지막 한 모금의 술은.
아직 그를 친구로도 동료로도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때론 지독하기까지 했던 그 냄새에 감춰져 난 그의 원래 냄새를 알지 못했다.
그런 라 부장 그리고 유지신은 새벽 동안 조그만 방에 앉아 날 기다려야 했을 것이며, 동이 트면 비틀거리며 부축되어 나오는 자를 데리고 다시 차 뒷좌석으로 옮겨 실어야 했을. 그때 내 앞과 옆에 선 사람이 누구였는지 난 기억하지 못했다.
평양 아침 도로를 달리는 차 한 대로부터 술 냄새가 풍겼을지도. 난 해가 뜨고야 잠들었다. 한낮에는 그 꿈이 끝으로 다다르고 있었을 것이며, 라 부장은 그런 날 깨워 점심 먹자 말한다.
내 일요일의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아리랑의 평양냉면, 때로 그 연못에 토할 지경이었다.
망치를 든 손은 노동자를 뜻하며, 붓은 지식을, 낫을 든 손은 농부를 의미했다. 조선 인민의 모든 승리의 조직자이며 향도자인 조선로동당 만세! 라는 글자가 그 아래에 적혀 있었고.
그건 1995년에 완성된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 기념탑이었다. 차는 글이 이어지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으며. 그 글자들을 끝내 외우지 못한 채로 지나왔음을.
집으로 왔을 때 라 부장의 손에는 조그마한 핸드폰이 들려 있었고 난 본다. 곧 전화가 걸려 올 것을 안다. 휴대용 전화기를 외투 속에 넣어 다니는 라 부장은 그 모습은 승조원 마을에서는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 모양 그 형태를 까마득히 잊었던 듯, 그곳에서 내가 본 건 텔레비전뿐이었으니.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마치 그걸 작동하는 법조차 잊은 듯 난.
어느 날 그에게 전화번호를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반대로 그는 내게 그렇게 묻는데.
그때 그 번호를 알았더라도 난 지금 그에게 전화걸 수 없을 테니.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외부 세계와의 접속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렇다. 그를 부르고자 그 소리를 전해 보낼 수 없음을.
라 부장은 가끔 대답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입술을 닫는다던가 다른 질문을 하고는 했다.
그 즈음 내 전화기는 수사기관과 정보기관 사람들의 손때가 묻고 있었으며, 이곳으로 와 핸드폰을 돌려받게 될 때 난 그게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차가운 플라스틱은, 그 껍데기 안 혈관 속 피는 모두 멈춘 듯했고, 눈을 깜빡이며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려도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이.
그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게 언제일까. 그들은 날 찾고 있을까. 사람들은 지금 모두 무얼 하며 사는가.
난 왜 영화감독이 되려는 꿈을 꿨던지. 인생이란 지독한 예술가가 만든 꿈 같은 것이기에, 그러므로 난 알지 못한다. 지금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암실 속 드러나지 않는 심상은 누가 꺼내주지 않으면 태어나지 못하는걸. 헤어짐을 알고 작별 인사라도 했더라면 그 모습들을 잊고 지낼 수 있을 테지만.
독재자의 거대한 등 뒤로 사라져버린 듯, 그러나 난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마저 지워버린 채 살 순 없었다.
그들이 날 정말 그리워하고 있을지.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전화 속 통화기록과 메시지, 사진, 메모장마저 모두 뒤졌을 그 사람들이 말이다. 내 위치 정보는 그곳에서 멈춰 끊겼으니. 동쪽 땅 끝 그 어딘가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