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를 하고 난 후 희재가 검도학원엘 가고 나면 종민이는 무척 심심해한다.
“엄마, 나랑 놀아줘.”
“종민아, 내일 받아쓰기한다면서. 노트를 가져오너라.”
종민이는 노트와 문장이 적힌 표를 가지고 온다.
받아쓰기는 내가 열 줄의 문장을 한 줄씩 불러주면 종민이가 소리를 듣고 받아 적어 문장과 단어, 띄어쓰기를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연습이다.
“금세. 금세? 금세가 아니라 금세였네. 금세가 뭐지? 한자인가?”
나는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떠올리며 궁금해했다.
종민이는 잠시만 하더니 다시 일어나 한자 5급책을 가져온다.
받아쓰기를 하며 부지런히 일어나 움직이고 다시 앉는다.
받아쓰기표를 가지러 일어나고, 지우개가 필요하다고 일어나고,
채점할 때 빨간 볼펜이 필요하다고 일어나고, 급기야 한자책 가지러 간다고 일어난다.
받아쓰기가 끝나자마자 종민이는 한자책을 펴더니 “금세”를 찾는다.
“이제 금에 세는 뭐지? 이제라는 뜻은 뭘까.”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단어가 새삼스럽다.
“엄마, 자 봐봐 여기 봐봐. 이제라는 뜻은 바로, 때,라는 뜻이기도 해요.”
외우기보다는 원리를 이해하고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종민이는 한자책 밑에 깨알같이 쓰여 있는 여러 뜻을 일일이 불러준다.
“아, 그럼 이제라는 말은 바로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구나. 그럼 세는? 세상 세?”
종민이는 또 열심히 책을 펼치며 세상 세자를 찾는다.
“세상 세라는 말은 대상, 여기라는 뜻이 있대요.”
“아하, 그럼 금세라는 단어는 바로 여기라는 뜻이구나! 바로 당장, 그래서 금세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네! 재밌다.”
종민이와 한자책의 뜻을 읽으며 스쳐 지났던 단어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조심스레 도 생소해. 조심스레? 왜 레지?”
종민이가 받아쓰기에 조심 스래라고 써서 자꾸 틀린다.
“종민아, 조심스레를 늘려서 말해보자. 조심스럽~?”
“게!”
“그렇구나!”
종민이는 씩씩하게 조심스럽게라고 쓴다.
“단어를 줄여서 써봐.”
“아! 게가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맞았어!”
“그럼 속삭이듯도 길게 늘이면?”
“속삭이듯이”
“줄이면?”
“속삭이듯”
“그런데 왜 속삭이듯에 ㅅ이 붙을까?”
“속삭이드시 잖아. 그러니까 ㅅ이 앞으로 가서 속삭이듯이 된 거야.”
“만약, 속삭이듣이 라고 쓰면?”
“속삭이드디!”
“크크크”
종민이와 내가 쑥덕쑥덕 이야기하는 동안 밤 9시 8분이 되었다.
종민이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남편은 내게 오늘은 종민이와 함께 자라며 다른 방으로 간다. 이참에 나도 좀 일찍 쉬라는 말이었지만, 종민이를 재우기는 쉽지 않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종민이와 잠자리에 누웠다.
“종민아, 잘 자.”
종민이가 자신의 발을 내 배 위에 턱 하니 올린다.
“엄마, 오늘 있었던 일 말해보자요. 나는 일어나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에서 바둑이랑 한문을 하고 집에 와서 도복을 입고 태권도하고 집에 와서 간식 먹고 놀다가 저녁 먹고 형아랑 놀다가 받아쓰기하고 한문시험 보고 끝~! 자, 엄마도 말해봐요.”
“그래,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서 희재랑 종민이 아침식사 준비해서 주고 너희들이 등교하면 책을 쓰다가 점심시간에는 아빠랑 점심을 먹고 다시 책을 쓰다가 3시에 30분 쉬고 종민이가 와서 도복을 입는 걸 보고 종민이가 태권도 가면 좀 더 쉬다가 종민이가 집에 도착하면 종민이 간식 챙겨주고 형아 오면 형아 간식 주고 저녁식사 준비해서 저녁 먹고 종민이랑 받아쓰기하고 한자시험 채점하고 끝.”
누워있던 종민이는 물을 마시고 싶다고 물을 마시러 다녀오고, 다시 누워 있다가 쉬가 마렵다며 화장실을 다녀온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할 말이 많다. 나는 종민이 말을 받아주기가 너무 귀찮아서 늘 아무 말하지 않아야지라고 다짐하고 눈을 꼭 감는다.
“엄마, 오늘 나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아, 말을 안 할 수가 없네.
“무슨 일?”
“오늘 어떤 애한테 내가 입양가족이라고 말했는데 걔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너는 모르면 말을 하지 말라고 내가 손가락으로 코를 눌러 주었어.”
“누군데?”
“나도 몰라. 4반 아이인데, 내가 거짓말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화가 났어.”
“그 애는 몰라서 그런 거야.”
“그러면 말을 하지 말아야지. 왜 나보고 거짓말이라고 해. 그런 애는 좀 맞아야 돼.”
“종민아, 친구를 때리면 안 돼.”
“아니, 너무 화가 나잖아요. 막 때려주고 싶어. 이렇게.”
종민이는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꽝! 꽝! 주먹으로 내리친다.
“이렇게 막 때려주고 싶었는데 내가 참았어.”
“잘했어. 때리면 안 돼. 몰라서 그런 거니까 용서해 줘야 해.”
“입양 이야기는 왜 나온 거야?”
“몰라, 엄마 아빠 얘기하다가 그냥 나왔어.”
종민이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얼버무린다. 다만, 혼을 내주고 싶고 싸우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듯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치고 발로 차는 시늉을 한다.
“나도 알아요. 그래서 내가 엄청 참았어. 한번 더 그러면 이렇게 때려 줄 거야.”
종민이는 몸으로 부딪치거나 몸을 움직이며 노는 놀이를 좋아한다. 일부러 자신의 몸을 벽에 부딪치기도 하며 바닥에 슬라이딩하거나 나한테 힘겨루기를 하자며 나를 붙들고 힘을 쓴다.
8살 종민이는 한창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은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면 남편은 종민이를 꽉 붙들어 안는다. 종민이가 제발 놔줘요라고 말할 때까지. 종민이는 겨우 빠져나와 나를 붙잡고 놀아달라고 한다. 종민이에게 아빠의 힘은 놀이대상이 아닌 구속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남편을 원망하지만, 양육방식이 다르고 놀아주는 방법도 다르기에 그냥 인정해 줘야 가정이 평안해진다.
그러나 종민이를 재워야 한다. 오늘따라 종민이는 계속 종알댄다.
“종민아, 자자. 자고 내일도 즐거운 하루를 보내자.”
밖에서 띠띠띠띠 소리가 울리고 희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희재가 왔으니 종민이는 쉽게 잠들기 어렵겠군. 희재는 방에 들어오더니 내가 자고 있는 매트리스에 벌러덩 눕는다.
“얘들아, 일찍 자야 키가 커. 어서 자거라.”
그러면 희재는 다시 “키가 안 크면 어떡하지.” 로 시작하면서 가지를 뻗고 종민이의 가지도 뻗어진다.
“엄마, 나는 나중에 건축가가 될 수 있을까.”
“그럼~”
“내가 볼 때 건축가는 공부를 잘해야 하는데 너는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니까 어려울 거 같아.”
“희재야, 동생에게 그런 말 하면 안 돼. 누구를 지적하거나 비방하면 안 돼. 비교하면 안 돼.”
“지적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라고요.”
“희재야, 상대방이 듣기에 기분 상하는 말을 하면 안 돼.”
희재는 내 말에 기분이 상한 듯 굴러서 자기 자리에 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너희는 훌륭한 어른이 될 거야.”
“종민이는 훌륭한 어른이 못 될 거 같아.”
“희재야, 서로의 장점을 한 개씩 말하거라.”
종민이가 희재의 얼굴을 보고 진지하게 말한다.
“형아의 장점은 의젓해. 의젓한 거 같아.”
갑자기 의젓이라는 단어를 꺼낸 종민이의 진지한 말투에도 희재는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너의 장점은 자기가 한 말은 기억 못 하고 자꾸 다른 말을 하는 거야.”
“희재야.”
나는 다시 희재를 불렀지만, 결국 고개를 돌려 모로 누워 눈을 감아 버렸다. 자야지.
십여 분이 지났을까. 아이들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