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는데 상대가 이제 막 글자를 알게 된 초등학생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육아휴직을 하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들 글쓰기'였다.직장 생활을 하면서그나마 많이 해본 게 글쓰기였기에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렇게 육아휴직 첫 번째 과제에 도전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께 존경을 표한다.
독서지도사
육아휴직 한 달 만에 아들과 아들 친구 A를 데리고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다.막상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나도 공부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과 책임감이 생겼다.한 달간 온라인에서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논술지도사' 자격증 과정을 들었다. 열심히 가르쳐준 강사에게는 미안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독서지도사' 자격증 과정을 들었다. 이 강사는 실전 경험이 많은, 특히 어린이 글쓰기를 많이 해본 분이었다.더 이상 새로운 지식을 넣을 수 없는 머리가 됐는지 역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독서/논술지도사는 민간 자격증이다. 다들 '국무총리실 산하 한국직원능력개발원에 등록된 업체'라고 소개한다. 그래도 민간 자격증을 이력으로 내세우기는 2% 부족하다. 물론 이력서에 아무것도 없는 거보다 나을 순 있다. 회원가입을 하면 3가지 과목을 무료 수강할 수 있다. 수강료가 없는 대신 자격증 발급 비용이 8만~9만 원이다. 교재는 무료로 다운로드하고 프린트할 수 있지만 2만 원을 내면 깨끗한 제본을 배송해준다. 수업 마지막 단계는 자격시험이다. 총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 받으면 자격증 발급이 가능하다. 강의를 다 들으면 40점을 준다. 온라인으로 치러지는 시험에서 20점을 더 따면 자격증을 발급할 수 있다. 시험은 교재에 첨부된 기출문제에서 출제된다. 두 과목을 수강했지만, 돈을 내고 자격증을 사는 것 같아 자격증은 신청하지 않았다.
여덟 살 글쓰기
정작 글쓰기 수업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책이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방법론을 제시하는 책들이 많아 몇 권 읽어봤는데 정말 공부할 게 많았다. 그중 '여덟 살 글쓰기'라는 책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꼭 맞는 책이었다. 지은이는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인 오은경 님인데(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유명한 의사 선생님과 성함이 비슷하다), 초등학교 1~2학년을 위한 글쓰기를 쉽고 지루하지 않게 풀이해놨다.구체적인 사례와 현실적인 내용만 담고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가령 글쓰기의 시작이 맞춤법, 띄어쓰기로 평가하는 받아쓰기가 되면 안 된다든지, 지렁이가 날아다니는 글씨체를 지적하지 말라든지, 아이들이 방금 한 말들이 바로 글이 될 수 있다든지... 읽다 보면 나를 반성하게 된다. 교편을 잡은 지 26년 차인 오은경 선생님의 교수법도책 곳곳에 녹아 있다. 초등학생을 한 번도 가르쳐본 적 없는 나에겐 말 그대로 교과서였고, 실제로 첫 한 달의 절반은 이 책으로 수업한 것 같다.
1주일에 두 번, 생각쓰기
아이들에게 학습 강박을 덜어주기 위해 수업, 공부, 글쓰기라는 말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아이들이 글쓰기에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게 최대 목표다. 생각쓰기는 1주일에 두 번 아파트 도서관 스터디룸을 빌려 진행하는데, 한 번에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물론 아이들이 글을 계속 쓰고 싶어 할 때는 시간에 상관없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진행 방식은 인위적으로 정하진 않았는데 몇 번 해보니 저절로 패턴이 생겼다. 처음 교실에 들어오면 간단히 음료를 마시고 쉬면서 자유롭게 수다 떠는 시간을 갖는다. 그중 의미 있는 이야기는 내가 그때그때 받아쓴다. 수다가 길어지면 "이제부터 하고 싶은 얘기는 글로 써서 전달하자"라고 분위기를 전환한다. 본격적인 생각쓰기가 시작되면 글을 쓰든지, 그림을 그리든지 자유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가 목표이지만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실제로 그림 그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집중력도 훨씬 좋았다. '수업 시간'인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한다는 게 새로웠나 보다. 어린이집부터 유치원, 학교, 학원까지 정해진 커리큘럼에 몸과 생각을 맞춰야 하는 아이들에게 하루 15분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수업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현재까지 아이들과 정한 규칙은 교실 돌아다니지 않기,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 두 가지다. 도서관 이용자에게 민폐를 끼칠 것 같아서다.
이게 바로 글이다
생각쓰기는 내가 주제를 던져주지만 주제에 맞게 쓰는 경우는 반반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를 때는 말하게 놔두고 그것을 내가 받아쓴다. 아래는 내가 실제로 받아쓴 내용이다.
나는 축구가 싫다.
학원을 다니는데 재미가 없다.
야구를 하고 싶다.
받아 쓴 내용을 읽어주며 '이게 바로 글이야'라고 하면 아이들이 깜짝 놀라고 진짜로 글이 됐는지 받아쓴 것을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 자리에 앉아 다른 글을 스스로 쓰기 시작한다. 좌충우돌은 항상 있다. 한 번은 두 아이가 프로야구에 빠져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이긴다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글을 똑같은 내용으로 2주째 썼다. 쓴 내용은 대게 이렇다. 한 아이가 'A팀이 B팀을 10대 0으로 이겼다'라고 쓰면, 다른 아이가 'B팀이 A팀을 무한점 대 0으로 이겼다'라고 맞받아친다. 더 이상 쓰면 안 될 것 같아 상대방이 점수는 어떻게 내서 이겼는지 등을 써보라고 했더니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쓰겠다고 했다. 다른 날은 "놀이터에서 학교 친구를 만나 놀기로 했다"면서 스터디룸에 들어오자마자 나가려고 해서 하나만 쓰고 나가자고 설득하는데 진땀을 뺐다. 대게 초등학생들의 친구 만나는 약속은 시간과 장소가 모호하고 부모에게 얘기하지 않아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아이의 놀이터 약속도 이런 경우였는데, 이 날도 30분 정도 생각쓰기를 성실히 수행했다. 아이들에겐 동기 부여를, 부모에겐 글쓰기를 통해 나타난 아이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게 한 달이 지나면 문집을 만들어 줄 예정이다. 오은경 선생님처럼.
*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 분들께 깊이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본의 아니게 저작권 침해 또는 명예 훼손 소지가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