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계산기만 두드리고 계십니까?
내가 40세에 캐나다 로스쿨에 도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사람 혹은 사연 중에 50대에 캐나다 로스쿨에 도전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건 다른 글에서 짧게 이야기 했다. 그런데, 처음에 그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보고 야, 어떻게 그 연세에, 영어로 진행되는 로스쿨에, 1세가 도전할 용기를 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50대에 로스쿨을 가면 가성비가 너무 나쁜 것 아닌가?
한국도 그렇겠지만, 캐나다도 로스쿨 학비는 비싸다. 2024년 현재 온타리오 주에서 가장 비싼 로스쿨은 1년 등록금만 해도 4천만원에 육박한다. 로스쿨 졸업에만 1억원이 든다.
비용은 그것 뿐이 아니다. 학업 중에 사야하는 교재도 한 권에 20-30만원은 보통이고, 졸업식에 입을 가운에 까지도 백만원 이상씩 (그래서 반 이상이 대여를 하지만) 돈이 드는 것이 로스쿨이다. 게다가 캐나다에서 나이 50이면 남자든 여자든 일을 하던 분들은 아직 일을 하면서 자신이나 가족의 생계를 돌보는 나이다. 그 할머니께서도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다.
그렇게 벌 수 있는 때에 벌지 못하는 비용까지 따지면, 그 분은 사실 2-3억 정도의 비용을 투자한 셈이 된다. 그리고 변호사가 된 후에는 자격증 유지에만 3백만원이 넘는 비용을 변호사 협회에 내야 한다.
그러니, 졸업하고 1년 연수를 마치고 변호사 자격을 따면 50대 중반이 되는 그 할머니의 결정에 대하여 가성비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 취직하면 원화 기준으로 9자리 연봉으로 시작할 수 있으니, 가성비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몇 년만 일하면 투자한 것 다 뽑고 흑자 인생으로 돌아설 수 있고, 실력을 인정받아 파트너 변호사가 되면 몇 백만불의 연봉을 받을 수 있으니 투자 수익으로는 엄청난 셈이다.
하지만, 투자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러니까 로스쿨을 시작하는 그 순간에는 그런 보장이 없다.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건, 로스쿨에 재학 중인 모든 1, 2, 3학년을 다 아울러도 극소수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그러니, 50대가 되어서, 모아 놓은 돈을 털어, 현재 수입을 포기하고, 그렇게 시작하기에는 로스쿨은 채산성이 떨어지는 투자가 확실했다. 게다가 그 할머니는 대형 로펌을 바라고 로스쿨에 가신 것도 아니었다.
그 할머니께서는 오랫동안 social worker,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분들엑 도움을 주시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계셨다. 그러면서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한 분야에 한인 변호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셨다고 했다.
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인이 많은 분야에 한인 변호사들이 없을까...? 생각해 보면 답은 뻔하다.
그 분야는 수입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로스쿨에도 "변호사 자격을 딴 후 어려운 사람을 돕는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동기들이 많았다 - 적어도 처음에는. 어느 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로 유명한 변호사 한 분을 로스쿨에서 모셔서 특강을 듣게 되었는데, 나도 친구따라 참석을 했고, 강의 중에 그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제 연봉이 얼마쯤 될 것 같나요?
다들 차마 말은 못하고 답변만 기다렸다. 자원봉사보다는 나은 수준이라고 했으니 수입은 낮겠지만, 그래도 변호사인데... 기본은 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변호사 분이 말씀하셨다.
작년 기준 3만불 정도입니다.
다들 웅성웅성. 아니, 낮아도 너무 낮은 것 아니야?
공대 학부만 나와도 알버타주에 가면 7만불 연봉을 받을 수 있던 때였으니, 대학 졸업 후 1억원과 4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은 것 치고는 너무 낮은 수입이었다. 3만불이 초봉이라면 혹 몰라도 저렇게 경력이 쌓인 후에도 3만불이라니. 4인 가족 기준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저 비용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니, 본전을 뽑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수입으로 어떻게 생활하시고, 학자금 대출은 어떻게 갚으셨나요?
그랬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부자거든요. 부모님께 받은 유산이 많아요. 여러분도 부자가 아니라면 이 분야로 오겠다는 결정은 쉽게 하지 마세요.
그 후로 이 분야를 가겠다는 동기들이 확 줄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이렇게 가성비가 떨어지는 분야에 1억원씩 돈 써가며 자원하는 것은 종교인 정도의 사명감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할머니께서는 그런 분야를 해 보시겠다고 로스쿨을 가신 거였다. 그래도 20대라면 언젠가 본전은 뽑을수도 있겠지만, 50세에는 어쩌면 이미 손해가 확정된 투자였을지도 몰랐다.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아서 그 할머니께서는 팬데믹 이전에 변호사 생활을 그만 두셨다. 과연 그 할머니께서는 본전을 다 뽑으셨을까?
그 답은 짐 애보트라는 미국 야구 선수에게서 찾을 수 있겠다. 투수였던 이 선수는 미국의 메이저리그에서 노히트노런의 기록까지 달성한 유명한 선수다. 그런데, 이 선수는 오른팔이 팔목까지 밖에 없었다. 오른손이 없으니 공을 던지고 수비하는 것을 모두 왼손 하나로 해결해야 했다. 타자를 할 때에는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감싸고 배트를 휘둘렀다.
한 손이 없는데 야구 선수를 하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중에서 메이저리그에 서는 사람은 몇 일 것이며, 그 중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처음부터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가나 짐 애보트가 그 자리에 서기까지의 어려움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겠지만, 메이저리그에서 323번 밖에 없다는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남겼으니, 어쩌면 야구 팬들이 생각하는 본전은 뽑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른손이 없는 상태에서 어려서부터 야구를 하면서 짐 애보트가 그런 식으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다고, 본전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짐 애보트가 남긴 말 중에 이런 말 때문이다.
"야구장을 향할 때마나 나는 내 팔이 아니라 내 꿈을 보았다"
아마도 그 할머니께서도 로스쿨을 향하면서 당신의 나이, 당신의 두뇌, 당신의 수입을 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보신 것 아닐까 싶다.
같은 도시에서 변호사 일을 하면서도 그 할머니 변호사와 따로 만나볼 기회는 아쉽게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4년을 투자한 후 만일 1년 밖에 변호사 생활을 하지 못하셨더라도, 그 할머니는 후회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 큰 만족은 꿈은 성취하는 데에 있고, 그 성취를 얼마나 오래 누리느냐에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생각했던 가성비나 본전은 그 할머니께 아마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여쭤보더라도 그 할머니께서는 본전을 뽑았노라 말씀하실 듯 하다.
나는 계산기를 잘 못 두드려서 로스쿨 행을 택했다. 캐나다는 미국과 달리 10달의 연수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연수 자리를 구하지 못해 변호사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운이 좋았다. 만일 계산기를 잘 두드렸다면, 나는 로스쿨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은 이렇다. 뭐든 투자를 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것은 장려할 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뭐든"이 나의 꿈이라면 적어도 그 곳은 계산기를 두드려서는 안 될 곳이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면, 지금 꿈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