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에게 일이란? 일과 지위가 나의 자존심이다

일과 지위를 잃는다는 것은 내 꿈을 잃는다는 것과 같다.

by 심상 중년심리

중년 남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일과 지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일과 지위 자체가 아니라, 일과 지위가 곧 자존심이라는 점이다.


A 선배는 임원이 된 지 2년 만에 해임 통보를 받았다. 통상적으로 2년 임기를 하고 한 번 정도는 연임하는데, 본인도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2년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해임 통보를 받은 날, 우연히 나는 그 선배 사무실에 있었다. 해임 통보를 받고 선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골프 일정을 모두 취소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퇴직은 퇴직이고 골프는 골프인데, 퇴직했다고 골프 약속을 다 취소할 이유가 있을까? 지금 돌아보면 남자는 사회적인 지위를 자기 자존심과 동일시한다. 선배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이다.

B는 IMF 위기 때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다. 40대 초반의 퇴직은 그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한동안 아내에게 퇴직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러다 아내가 이웃을 통해 B의 퇴직을 알게 되었다. 자존심이 상한 B는 예민해졌고, 결국 이혼에 이르렀다.


일과 자존심이 하나가 된 세대

일에 대한 의미는 세대별로 차이가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일의 형태도 다양하고, 놀이와 일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회보장이나 복지가 그런대로 갖춰져 있어서 직업을 잃고 돈이 없어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중년 남성이 성장한 시기는 달랐다. 기초 사회보장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일이 없으면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고, 정말 길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 생존 그 자체였고, 자연스럽게 일이 곧 자신의 존재 가치가 되었다.


유교 사상과 가장으로서의 권위

중년 남성들이 왜 이렇게 일에 집착하는가? 그 뿌리는 우리나라 유교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유교 사상에서 남성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권위를 갖는다. 그 반면에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와 책무도 동시에 갖는다. 그래서 남성들에게 일이 없어진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력 상실이 아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권위가 함께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일을 통해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곧 자신의 자존감이었기에, 일을 잃으면 자존감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IMF를 거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일에 매달린 삶

베이비부머 세대 남성들은 지금까지 IMF 위기 등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왔다. 대학 입시 경쟁이 치열했고, 직장을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으면 그 자리를 보존하기 어려웠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사회에서 승리해야 했고, 결국 50대 중반쯤 되면 대부분 탈락하고 소수만 살아남게 된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다 보니 개인적으로 취미생활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직장인들에게 흔한 취미인 골프조차 단순히 체력을 단련하는 운동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넓히고 비즈니스를 하는 수단이었다. 평생 동안 일 자체에 매달려 살았기 때문에 순수한 취미생활이 거의 없었다.


일이 자존심이자 나의 삶, 전부이기도 하다

일 자체가 자존감이었기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되면 경제력만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심도 함께 상실한다. 은퇴 후 나타나는 가장 큰 반응이 우울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부분 직장을 그만두고 나면 한동안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때로는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그 해방감은 몇 달을 가지 못한다. 일 없는 삶이 지겹고 권태로워서 대부분 기분이 매우 우울해진다. 놀아본 일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놀아야 할지를 모르고, 직장을 상실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남을 떳떳하게 만나기도 어렵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관계

자존심과 자존감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자존심은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외부, 즉 타인 중심적이다. 반면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고 가치 있다고 믿는 마음으로 내부, 즉 자기 자신 중심적이다. 자존심은 남에게 지지 않으려 하거나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고, 자존감은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며 안정감을 느끼는 상태다.

진정한 행복은 남과 비교하는 높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높은 자존감에서 나온다.


자존심을 넘어서 진정한 자존감을 찾는 여정

자존감은 내가 나를 스스로 존중하는 마음이다. 내 형편이 비록 어렵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 자족하면 자존감은 높아진다.

C는 30대에 일찍 남편과 이혼했다. 이혼 후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하며 인정받았다. 힘든 직장 생활 가운데에서도 자녀들을 잘 키웠다. 자녀들은 이제 결혼도 다 했다. 이제 C는 장구도 배우고, 독서 모임도 가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C가 나에게 뼈아픈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빠, 인생은 즐겁게 살기에도 짧아. 하루하루를 허비하지 말고 즐거운 일을 찾아봐.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야. 행복하려고 노력하고, 취미를 찾고, 즐거운 일을 할 때 비로소 행복해져."


굴곡진 삶과 절망을 극복하며 살아온 C의 말은 높은 자존감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다.

일과 지위를 잃는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처음에는 막막하고 두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회사가 정해준 목표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동안 미뤄왔던 책을 읽고, 악기를 배우고, 봉사활동을 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진정한 자존감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서 온다. 임원이었든 평사원이었든, 은퇴 후의 삶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가느냐다. 과거의 지위에 연연하며 우울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나를 발견하며 행복을 찾을 것인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