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곁에서 말없이 45도 밑의 허공을 응시한다. 오랜만에 반쯤 눈이 감긴 상태로, 생각에 잠겨있다. 연애 초반에는 많이 보였던 표정이다. H는 어떤 결심을 내리기 전에 이렇게 생각에 잠기곤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운했던 어떤 것이 있는지 물어본다. H는 질문을 하는 나를 잠시 쳐다보곤 대답이 없이 다시 생각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본다. 잘못한 게 없는 것 같기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이 다가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 H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
휴, 다행이다. 무언가 나에게 서운한 게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대화는 나에 관한 주제가 아니다. 나에게 서운한 어떤 것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오늘은 심각한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H가 나에게 얘기를 꺼내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주제로 나와 다투고 싶지 않거나, 나를 위해 배려하는 차원에서 얘기를 하지 않거나, 얘기를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 당연한 경우이다. 오늘은 나의 느낌 상 세 번째 이유였던 것 같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의 성향 중 몇 가지 변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마 내 성향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서운한 게 있는 것 같다는 것조차 내 추측이지만 말이다. 감이 전혀 오지 않지만, 얘기를 하지 않는 이유가 나를 위한 것일 수 있다. 그래도 너무 나를 생각하기보다는 서운한 것이 있다면 털어놨으면 좋겠다.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와 감정은 꽤 해소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말을 하지 않고 혼자 삭힐 경우 감정은 계속해서 누적된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은 바다 밑에 모래가 쌓이듯 서서히 차오른다. 그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바다의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그때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높게 쌓여온 모래들은 치우려고 노력한다고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얕아진 수심은 인내심과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조그마한 행동에도 쉽게 역치를 넘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다 밑으로 헤엄쳐서 모래가 쌓이지 않도록 그때그때 파헤치는 것이다.
모래를 파헤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는 계속해서 퀴즈게임을 하는 것이다. 내가 했던 행동이나 챙기지 못했던 경우의 수를 모두 생각해서 물어본다. 사색에 빠진 H는 나의 물음에 잘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다 맞추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H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질에 파고들어야 한다. 서운해하는 이유를 파악하고 그 근본 원인을 제거한다. 그러려면 진심 어린 마음으로 H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나 자체가 원인인 경우에는 나를 제거해야…
퀴즈게임을 계속해도 답을 맞힐 수 없는 상황이 있다. 그럴 때는 두 번째 방법을 활용한다. 있는 힘을 다해 H에게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관심 또는 애정도가 떨어질 것 같다는 느낌을 주거나, H를 우선하지 않는 어떤 행동을 내가 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 자신이 제거되어야 해소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당장 H의 삶에서 제외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해소해 줄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해를 푸는 것뿐이다. 최대한 바다 밑바닥까지 잠수해서 관심의 빗자루로 조금씩 쌓인 모래들을 해류에 쓸어 보낸다. 나는 H에게 변하지 않는 마음을 줄 것이라는 확신의 메시지를 건넨다. 하지만, 사랑과 관심의 메시지는 지속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길어야 1주일이다. 지금 당장 표현을 했더라도, 앞으로도 꾸준히 계속해서 메시지는 보내야 한다. 한 번 하고 끝~ 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랜 기간 꾸준히 건네야 하는데 이것은 즐겨야만 가능한 일이다. 다행인 것은, 원인이 명확하진 않아도 계속 관심과 사랑의 빗자루로 쓸어내다 보면 H의 마음이 풀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생각과 내면을 가져 파헤치기 어렵지만, 내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쓸어내다 보면 잠깐은 개운해진 H의 표정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아무튼 나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던 것은 아주 잠시였고,
오늘은 본인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약간은 안심한 내가 대답했다.
“방향을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이 물론 맞지만, 일단은 한번 어떤 방향이든 발을 내디뎌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H는 원하면 어떤 방향으로든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시작부터 최적의 루트를 찾는 것은 어렵다. 모든 방향을 끝까지 경험하고 선택할 순 없기 때문이다. 몇 발 내디뎌보고, 자신과 맞는지 파악해 본다. 잘 맞으면 몇 걸음 더 걸어보면 되고, 잘 안 맞으면 방향을 약간 틀어서 걸어보면 된다. 그래도, 일단 발을 내디뎌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발을 내딛을 때 내가 H의 곁에 함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