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의 밤에 나는 성실히 늙는 잠을 잔다
어둠 속에서도 책은 책을 반듯하게 밀고
북엔드는 멸종의 감정으로 서 있는 것이다
내가 꿈으로 숨으면 그제야 책장은 발꿈치를 든다
가장 오래 손길 닿지 않은 책에서 후드득 소리가 난다
밑줄이 무너지고 꿈같은 문장들이 바닥에 나뒹군다
재래식 사랑을 기억하는 낱말부터 뿔뿔이 흩어진다
문장부호는 방바닥에 귀를 대고 울음의 물음을 듣는다
시로 가지 못하고 죽은 구절이 잠든 나의 이마를 짚는다
꿈이 아침에 닿으면 무너지지 않는 밑줄처럼 눈을 뜬다
간밤의 사연에 무수한 모서리를 가진 방이 보인다
가까운 천장 패턴은 먼 천국의 패턴에 갇히지 않는다
뒤척임에 태어난 먼지는 반복되는 열망의 사체들로 밝혀진다
헹궈도 씻기지 않고 닦아도 다시 쌓이는 날들과 절충한다
루이 비통에 에리히 프롬을 포장해 넣어주는 일
에르메스 스카프를 마르틴 부버 매듭으로 묶어주는 일
시인에서 퇴근하는 마음으로 센터의 문화를 위해
(시현실, 2023년 5월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