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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고 요동치는

이승우 『고요한 읽기』

by 서정아

잃어버릴 두려움이 없는 상태, 초조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은 상태, 그러니 잠그기나 가두기가 필요 없어진 상태를 사랑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가. 사랑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지 않게 된 형편에 대한 표현처럼 내게는 이해된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마태복음 22:30) 영원에 이르게 된 그들에게 영원을 꿈꾸는 것이 본질인 사랑이 아직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천사들과 같이 된 그들에게 사람의 욕망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시간의 변덕을 견디는 것이 삶이라면 천사를 살아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시간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죽음 후의 삶은, 삶의 삶과는 다른 삶일 것이다. 사랑은 흔들리고 요동치는 시간 위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독점된 것이다. 그래서 불안정하지만,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연연하는 것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저승의 신이 오르페우스에게 약속한(약속할 수 있는) 것은 에우리디스와 ‘함께 있는’ 것이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함께 있는’ 것만 약속한다. ‘함께 있다’가 ‘사랑하다’의 다른 표현이라는 건 아마 관습적 오해일 것이다. 그가 ‘삶은 절대 줄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삶이 줄 수 있는 것을 절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영원을 약속할 수 있지만 사랑을 약속하지는 못한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이승우 산문집 『고요한 읽기』 중에서


드로잉.jpg Head by head (man and woman kissing) (1905)Edvard Munch (Norwegian, 1863 - 1944)


<나의 단상>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라는 정의.

사랑 앞에 늘 서툴고 불안한 이들에게 건네는

나지막한 위로.


사랑에는 숭고함도 있고 자기희생도 있고

그밖에도 수많은 이상적인 가치가

포함되어 있겠지만,

가장 인간적인 마음, 근원적인 불안,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잃고 싶지 않으니까 집착하게 되는 마음.

그런 마음이 당연한 거라고,

사랑 앞에서 초연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오히려 진짜라고,

고요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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