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의 계절 ― 손의 기억)

배추 두 포기의 위로, 그게 내 올해의 김장이다.

by 운조


“손끝에 겨울이 묻는다.”

올해 김장을 할까 말까 망설여진다.

식구들이 예전만큼 김치를 많이 먹지 않는다.

김치찌개도 가끔 끓이고,

매운 음식이 부담스러워졌다.

요즘은 무나 배추로 담근 물김치를 더 자주 찾는다.

맵지 않고 시원해서 식사 후에도 부담이 없다.

무와 배추로 담근 물김치는 소화에도 좋고, 변비에도 도움이 된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나이에,

이제는 음식도 마음도 부드럽게 익히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예전에는 김장날이 되면

집안이 온통 고춧가루 냄새로 가득했다.

큰 대야에 양념을 개고,

배추를 소금에 절이며 손이 퉁퉁 부을 때까지 버무리던 시절.

김장은 이웃과 친구들이 함께하는 잔치 같은 날이었다.

누군가는 배추를 나르고,

누군가는 양념을 버무리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손이 고춧가루로 빨갛게 물들어도

그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날 저녁이면

갓 버무린 김치를 삶은 삼겹살에 싸서 먹는 보쌈,

그리고 동태찌개 한 솥이 김장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무와 두부, 대파를 듬뿍 넣고

보글보글 끓이던 찌개의 냄새는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사실 김장날의 동태찌개는 단순한 찌개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찬바람 속에서 일한 손발을 녹여주던 국물,

허기진 몸과 마음을 달래주던 따뜻한 위로였다.

얼었다 녹은 동태는 겨울 바다의 생명력처럼 탱탱했고,

그 국물 속에는 ‘오늘 함께 일한 사람들의 정’이 깊게 우러나 있었다.

일손을 돕던 이웃들이 둘러앉아

김장김치에 보쌈 한 점을 올리고

뜨끈한 동태찌개 국물을 나눴다.

그 자리에는 웃음과 수다가 이어졌고,

누군가 “이 맛에 김장하지요.” 하며

젓가락을 들면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날의 밥상 위에는

노동의 땀과 정,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있었다.

그때의 김장은 음식이 아니라 나눔의 축제였다.

김장이 끝나면

도와준 이웃들에게 김치를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김치가 이 집 저 집으로 오가며,

겨울의 맛이 퍼져갔다.

배추의 절임 정도도, 양념의 간도, 젓갈의 향도

집집마다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한 해 겨울 동안

우리 식탁에는 여러 맛의 김치가 모였다.

그 맛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처럼 익어갔다.

김치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맛이었다.

그런 이유로,

‘김장문화’는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단순한 음식의 전통이 아니라,

함께 손을 맞잡고 음식을 나누며 관계를 이어가는

공동체의 마음이 세계가 인정한 가치였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풍경이 멀어졌다.

식구도 줄고, 일손도 줄었다.

이제는 ‘김장’이라기보다

작은 김치 담그기일 뿐이다.

그래도 그 일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요즘은 마트에서도 김치를 쉽게 살 수 있다.

교회에서는 선교비 마련을 위해 김치를 담가 팔고,

그때 한 통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끔은 코스코 진열대에 김치가 놓인 걸 보면

‘이젠 김치도 미국 사람이 먹는 음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민자의 냉장고에는 언제나 김치 한 통이 있다.

밥상 위에 김치가 없으면 식사가 어딘가 허전하다.

그 한 조각 속에 고향의 냄새와 엄마의 부엌이 들어 있다.

사실 올해 내가 담그려는 건

‘김장’이라 부르기엔 너무 소박한 김치 몇 통이다.

배추 두 포기, 무 몇 개,

양념도 예전만큼 진하지 않게,

그저 담백하게 버무리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넉넉해진다.

손으로 채소를 만지고,

고춧가루를 한 움큼 쥐어 넣고,

조금 싱거우면 젓갈을 더하고,

그렇게 손끝에서 겨울이 시작된다.

김치는 내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위로’다.

냉장고 속 한켠이 든든해지고,

내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진다.

이민자로 산다는 건

언제나 두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다.

영어로 말을 해도,

손끝은 여전히 한국의 부엌을 기억한다.

내 안의 두 나라가

김치 한 통 속에서 화해하는 듯하다.

배추 두 포기, 무 몇 개를 버무리며

나는 여전히 고향을 이어가고 있다.

김치는 결국 ‘살아 있음’의 증거다.

익어가는 냄새 속에서,

나는 나의 계절을 지켜낸다.

그리고 그 냄새는

언제나 나를 다시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불러낸다.

손끝의 감각이 말을 대신하고,

젓갈의 짠내와 배추의 숨이

이민자의 시간 속에서 나를 붙잡아준다.

냉장고 속 김치 한 통은

이국의 부엌 한켠에서

고향의 불씨를 지키는 작은 항아리다.

그 속에서 내 손은 여전히 기억한다.

얼마나 버텨야 했는지,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

김치는 단지 발효된 음식이 아니라,

나의 역사이고,

나를 지탱하는 언어이며,

세계가 함께 인정한 유산 속에

조용히 숨 쉬는 나의 이름이다.




그리움의 냄새가 식탁 위에 피어오른다.


올해도 배추를 절입니다.

손끝에 남은 그 기억이,

내 겨울을 버티게 해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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