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보고 알았겠지

제비는 왜 박씨를 물고 왔을까

by 운조



산책길,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울타리 너머 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저는 하얗게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발견했습니다.

난생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고요하지만 단단한 존재감으로 피어 있던 그 꽃은 이상하리만치 제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바람은 느리게 흘렀고, 마음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울컥했다.


이름도 모르고, 본 적도 없던 꽃.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래 바라보았을까.

왜, 문득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을까.


이 순간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집으로 돌아와 꽃 이름을 찾아보니, 그것은 바로 박꽃이었다. 조롱박의 꽃.

박꽃은 해가 지고 세상이 어두워져야 비로소 피어난다고 했다.

낮에는 굳게 입을 닫고 있다가,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 속에서야 살며시 꽃잎을 연다는 사실이 어쩐지 마음을 흔들었다.


그 순간, 오래된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흥부와 놀부』.

다친 제비의 다리를 정성껏 치료해준 흥부에게 제비는 박씨를 물고 돌아온다.

그 박에서는 쌀이 쏟아지고, 비단이 나오고, 금은보화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박씨였을까?

호박씨도, 참외씨도, 고추씨도 있었을 텐데

제비는 왜 꼭 박씨를 물고 왔을까?


그 질문을 친구에게 던졌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박이 크니까.”


잠시 웃고 말았지만, 곧 이어 물었다.

“근데 제비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열매를 보고 알았겠지.”


그 말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그래, 박은 크고 속이 비어 있다.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


제비는 어쩌면, 흥부가 돌본 그 마음이 얼마나 큰지,

그 마음이 맺은 조용한 열매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기적은 어쩌면,

크고 비어 있고, 열매를 맺은 마음에 찾아드는지도 모른다.


박은 속이 비어 있는 열매다.

그 비어 있는 속은 바가지가 되고, 물병이 되고, 등잔이 된다.

갈증을 달래고, 음식을 담고, 어둠을 밝히는 그릇.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박이다.


생각해보면 흥부의 마음도 그랬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낮고, 욕심 없는 사람.

그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다친 생명을 돌보았다.


그의 마음은 비어 있었을 것이다.

욕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기에,

기적이 들어설 넉넉한 자리를 간직한 사람.


반면 놀부는 어땠는가.

형이라며 찾아온 흥부의 아이들을 문전박대하고,

박의 복을 탐내 억지로 선한 척을 흉내 낸 사람.


그의 마음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욕망과 탐욕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마음에는

기적이 들어설 틈조차 없었다.


박씨는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씨앗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또한 삶이 들려주는 조용한 진실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그날 저녁, 박꽃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이유는

어쩌면 그 조용하고 하얀 꽃이

내 안의 비어 있는 자리를 건드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쁘게 살아가며 잊고 지냈던 그리움,

누군가를 향한 미안함,

감정이라는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한 자락이

그 순간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하얀 박꽃이

어둠 속에서 고요히 피어나듯

내 마음속 잊었던 그리움

한 조각 빛으로 물들어가네.


빈 공간에 스며든 온기처럼

조용히 속삭이는 꽃잎의 말,

“지금, 당신 마음도 피어나고 있군요.”


그 말 없는 속삭임이

그저 꽃이 아니라

기적처럼 느껴졌다.


제비는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에게 박씨를 물고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박씨는

갑작스러운 금은보화가 아니라,

작고 소박한 가능성일 것이다.


기다리고, 정성껏 키우고,

사랑으로 돌보아야

비로소 기적처럼 열리는 열매.


오늘 저녁도 다시 그 길을 걸을 것이다.

하얀 박꽃이 피어나는 시간,

내 안의 그리움 또한 다시 활짝 열릴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조용히 다시 속삭이게 될 것이다.


열매를 보고 알았겠지.

기적이 아니면, 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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