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예찬"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던 겨울도 이젠 그 자리에 없다. 겨우내 찾지 못했던 남산엘 봄기운에 힘입어 올라본다.
주말이라 그런지 남산 팔각정과 N서울타워 부근 벤치는 딱히 빈 곳을 찾기 어렵다. 편히 앉을 공간을 찾기가 어려워 이내 발길을 돌린다. 정상 조금 못 미쳐 있는 제법 너른 공간에는 힘들게 자전거를 타고 남산에 오른 이들이 숨을 돌리고 있고, 버스를 타고 내리는 군상들로 북적거린다. 이젠 마스크를 잊은 채 숨 가쁘게 페달을 밟아 마지막 경사지를 오르는 이들의 모습에서 사이클링 등정의 험지이자 메카가 여기 남산이 아닐까 여겨본다. 길을 약간 벗어난 숲 속의 공간엔 싸 온 음식이나 간식들을 삼삼오오 혹은 혼자서 먹는 이들도 제법 눈에 띈다.
신록을 눈에 담으며 새롭게 찾아온 봄날을 본다. 이 봄도 곧 여름에 자리를 내어주리라. 계절이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사라지듯이 우리네들도 자리를 내어주며 황혼 너머로 사라진다. 오가는 길에 스친 청년들을 보며, 자연스레 내 지난 청춘의 시간을 반추해 보게 된다.
내가 청춘이었던 그 시절에 난 <청춘예찬>을 가슴이 아닌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글로만 배우고 알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그 인상 깊은 첫 문장과 몇몇 구절만이 내게 남아있다. 이제 다시금 1929년에 발표된 우보(牛步) 민태원 선생의 수필 “청춘예찬”을 떠올려본다.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중략)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으므로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다. 우리는 이 황금시대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 이 황금시대를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하여 힘차게 노래하며 힘차게 약동하자.
《청춘예찬》 민태원(1894~1934)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요즘의 저 젊은이들도 청춘의 때인 지금은 ‘청춘예찬’이 가슴에 와닿질 않으려나…. 청년의 시절 나는 청춘을 아마도 그저 벗어나고 싶었던 때로 느꼈다. 사실 난 ‘불확실·불투명·불안정’으로 점철되었던 그 청춘의 시간이 못내 싫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의 그런 나에게 ‘청춘예찬이란 허울 좋은 말'로만 보였고, ‘빛 좋은 개살구’쯤으로 여기지 않았나 싶다. 그러던 중 이와 비슷한 생각의 글을 우연히 찾게 되었다. '2004 연극열전' 시리즈의 열두 번째 작품으로 연극 '청춘예찬'을 소개하는 기사의 도입 부분이다.
어두운 청춘 서글픈 예찬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수필 ‘청춘 예찬’은 정열적인 어조로 청춘을 예찬한다. 하지만 청춘예찬은 더 이상 청춘이 아닌 자들이 그리움으로 부르는 노래일 뿐, 정작 청춘인 이들은 청춘을 예찬하지 않는다. 어떤 청춘에게 청춘은 예찬의 대상이 아닌, 빨리 벗어나버리고 싶은 무엇이다.
(후략)
강수진 기자
동아일보(D섹션 15면), 2004.10.22.
말 그대로 더는 청춘일 수가 없어서 인제 와서 그리움과 추억에 사무친 탄식일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시절엔 나 또한 그 진가를 제대로 몰랐던 나 자신이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지금도 나쁘지는 않으나, 지내고 보니 청춘의 그때가 참으로 좋은 때였다”라는 생각이 내게 스치는 오늘이다.
1920년에 출생하여 백수(百壽)를 넘긴 철학자 김형석 명예교수는 한 강연에서 '자신의 인생 황금 시기를 60~75세'라고 회고한다. 그리고 작고한 소설가 박경리(1926~2008) 선생과 박완서(1931~2011) 선생은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고, 홀가분하다고, 늙어서 편하다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좋다고, 젊음과 바꾸지 않겠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저마다의 인생 역정을 지낸 분들이니 다 나름대로 맞는 말일 게다.
인생에 무슨 답이 있겠냐마는 때를 다 지나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 참으로 더디고 얄궂은 나의 인식 수준이 문제인 셈이다. 내게 '청년의 때'는 가고 없다. 하지만 내게 남겨진 시간 동안 나의 영혼과 내면의 마음은 늘 푸르렀으면 좋겠다. 누구든 생각과 의식(意識)이 푸르른 그때가 청춘(靑春)의 시간이다. 적어도 우리의 마음에는, 인식과 의식에는 '푸르른 그때'가 늘 있어 주기를 고대한다. 해가 바뀌면 푸르른 봄이 또다시 찾아온다. 나도 나 자신 잊고 있었던 '푸르른 그때'를 또다시 찾아 나서야 하겠다.
(2022. 0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