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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Sep 25. 2024

영화 '룩백'과 글을 쓰는 이유


영화 '룩백'의 대사가 마음에 남아 내게 물었다.



"사실 만화 말인데.. 나 그리는 건 전혀 좋아하지 않아. 하나도 안 즐겁고, 음침해 보이잖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려도 완성되지 않는다구. 만화는 그냥 읽기만 하는 게 나아. 직접 그릴 게 못 돼."


"그럼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글쓰기도 때론 마찬가지. 한 페이지 남짓한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소재를 잡고, 내용을 연결하고, 문장을 매만지고, 제목을 고민하고... 그럼에도 나는 왜 쓰는가? 그럼 김이안 넌 왜 글을 써?



1) 쓰는 고통 중 느끼는 단맛 때문에


글쓰기는 쓸 때마다 새롭다. 매번 새롭게 어렵다. '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다' 칼의 노래 속 이순신의 독백이 글쓰기와도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글이 실타래 풀리듯 술술술 써지는 날이 있긴 하다. 정말이지 어쩌다 한 두 번. 일 년 중 3~4일? 대부분 머릿속 떠오르는 상념을 붙잡고 매만지다가 글로 조금씩 힘겹게 풀어낸다. 한숨을 쉬고, 답답한 가슴을 쿵쿵 치면서. 그래서 글쓰기는 거미가 찬찬히 거미집을 만들어 가는 것 비슷하다.



머리에서 바로 앞 빈 화면까지 물리적인 거리는 30cm. 그러나 이보다 아득한고 먼 거리가 또 있을까. 그래서 때로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때로는 지금 내가 대체 뭐하고 있나, 현타가 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말이다. 이 지난하고 때로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 느껴지는 희미한 단맛이 있다. 쓰디쓴 커피 속, 느껴지는 깊은 개운함이라고나 할까. 이 맛 때문에 글을 쓴다.



그리고 무엇보다, 쓰고 나면 후련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글쓰기를 똥싸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글똥을 싸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고.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반이 된다. 글을 쓰면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글을 쓰면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그 무언가를 계속 떠올리며 써야 한다. 그렇기에 그 좋음을 더 깊이 음미하며 그 설렘과 행복감을 마음속에 좀 더 오래 머물게 할 수 있다.  



반면 슬프고 고통스러운 걸 글로 쓰면 어떻게 될까? 경험상 미묘하게나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래서 덴마크의 작가 이자크 디네센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어떠한 슬픔도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낼 수 있다.'고.



2) 좀 더 재밌게 살기 위해


"비밀을 알려주듯 노인들은 말하지, 무조건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김영민, <가벼운 고백>



나의 학창 시절 별명은 '김진지'였다. 매사에 진지하다고. 필요이상으로 진지하다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누구에게나 잘 보이고 싶어 긴장을 했던 걸까?



좀 허술해지고 싶어 글을 쓴다. 타이트하게만 살면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들어올 틈이 없더라. 하루의 시간 중 여유 한 스푼, 농담 한 스푼, 웃음 한 스푼이 좀 들어가야 퍽퍽한 일상에 생기가 돌더라. 스스로 좀 더 재밌고 싶어서, 작은 웃음 포인트를 만들고 싶어서 글을 쓴다. 그러면 역시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물론 삶에는 여러 가지 심란하고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심각하고 절망스런 일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죽고 사는 문제 외에는 좀 덜 진지해지기로 했다. 덜 심각해지기로 했다. 죽음 앞에서는 다 부질없다는 걸 계솓 되새기기로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일상 속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고자 삶을 면밀히 관찰한다. 그러다 보면 깨알 같은 웃음 포인트들을 발견해낸다. 같은 현상도 살짝만 뒤틀어보면 재밌어지기도 한다. 헛웃음이 나와도, 고개를 땅에 떨구고 절망해 있는 것보다 낫다. 짧은 인생, 속절없이 가는 하루하루, 그 와 중에 좀 더 웃고 키득거리기 위해 글을 쓴다.



3) 기타 등등의 이유들


쓰고 나면 남는다. 기록이 남는다. 뭔가가 남기에 뿌듯하다. 레고처럼 내가 뭔가를 만들어냈다는 뿌듯함. 그리고 이게 하나하나 차곡차곡 보관되고 쌓이고 있다는 뿌듯함.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남아서 좋다. 그래서 쓴다.



 글을 누군가 공감해줘서 쓴다. 좋아요 하트가 좋아서 쓴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보잘것없는 글에도 누군가 공감하고 공명해줘서 쓴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미세하게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 쓴다. 내가 어떤 글을 읽고 위로받고 마음에 힘을 얻은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내 글이 그러하길 바라며 쓴다.



글을 쓸 때의 몰입감이 좋아서 쓴다. 몰입이 주는 에너지가 있다. 30분, 1시간, 2시간을 글쓰기 몰입했다가 현실로 나오면  미세하게 내가 바뀌어 있다. 내 안의 공기가 바뀌어 있다고나 할까. 몰입의 즐거움, 몰입의 희열이 글쓰기에 있다. 그 희열이 스스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뿌듯함을 준다. 그렇게 몰입했다가 머리를 식히러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고, 계통 없는 춤을 추며 몸을 흐느적거리면 엔돌핀이 나온다.






글을 쓰는 건 물론 어떨 땐 하나도 즐겁지 않고, 때로 음침해보이기도 한다. 하루 종일 매달려도 내 글이 시덥잖은  잡문으로 보일 때도 많다. 어떨 땐 탁월한 작가들의 생기발랄하고 명료한 글을 읽기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쓴다.



쓰는 고통 중 우러나오는 단맛 때문에. 좀 더 유머러스하고 재밌게 살기 위해. 글을 쓰면  기록이 남고 이야기가 쌓여. 누군가 공감의 하트하트를 눌러줘서. 세상 시름을 잠시 잊게 해주고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몰입력 때문에.



외에도 나를 조금은 더 행복하게 해주고,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기에. 나는 쓴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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