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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또 다른 몰입의 세계

삶의 또 다른 전환점

by 김이안


읽는 사람에서 쓰기도 하는 사람이 된 것. 내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다. 글쓰기의 맛을 알고 나니 책이 더 고파졌고, 맛깔나는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일상을 더 면밀히 관찰하게 됐다. 결국 글쓰기는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내가 겪는 갖가지 일들이 글감이 되고, 글로 바뀔 수 있음을 알았으니.



읽는 사람으로의 변화가 마음껏 헤엄치며 놀 수 있는 언어의 바다를 발견한 것 같았다면, 쓰는 사람의 변화는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만들며 소소한 창작의 기쁨과 뿌듯함을 느끼게 했달까.



그런데 읽고 쓰는 삶으로의 변환과 비견될 커다란 전환점이 내게 찾아왔으니, 그것은 바로 달.리.기.





솔직히 나는 걷고 산책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걷기는 좋은 운동인 동시에 머리와 마음에도 상쾌함을 주었다. 리듬감 있게 걸으며 햇빛을 쐬고 스치는 바람을 느끼면 생기가 돌았다. 굳이 힘들게 숨을 헉헉 대며 달리는 건 좀 지나치다란 게 그동안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읽은 책들 중에 '달리기'에 관한 내용들이 하나 둘 쌓여 내게 자극을 주었을 수도 있겠다. <마녀체력> <아무튼, 달리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지지 않는다는 말> 등의 책에서 작가들이 꾸준히 달리기를 하며 느낀 소회들이 '나도 한 번 달려볼까'라는 생각에 조금씩 불씨를 지핀 것일 수도.



그러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한 책. 이 책이 결정적이었다. '아니, 이 사람도 마라톤 풀코스를 몇 번이나 완주했다면,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과 함께 결국 러닝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한. <내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것들>란 책이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안철수라는 사람은 운동이라는 것과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인 것 같았는데, 그가 달리기를 꾸준히 하며 42.195km 마라톤을 했다는 게 내게는 충격이었다.



달리기를 계속하며 들었던 생각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기를 시작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오십 중반에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 결코 빠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늦은 때란 없지 않을까?

_<내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것들> 8p, 안철수



물론 개인적인 선입견일 수 있으나 운동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고 나이도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안철수. 그가 꾸준히 러닝을 하고 마라톤까지 완주했다면, 나도 해봐야겠다란 생각이 이 책을 읽고 유난히 강하게 들었 것이다.



여기에 운명처럼, 2주 후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알게 다. 마치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길을 열어주시는 것일까. 보통 마라톤 대회는 일요일에 하는데 이 대회는 토요일 오후 4시에 시작하는 울트라마라톤이라 참가할 수 있었다. 8만 원의 참가비를 입금했다. 돈이 들어고 목표가 생겼다. 이제는 달리기를 위한 몸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니 더 이상 뛰기를 미룰 수 없었다. 당장 달리러 나갈 수밖에.




첫 러닝의 기록



첫 달리기. 이게 얼마만의 러닝인가. 처음에는 무리하지 말고 딱 15분만 천천히 뛰자고 다짐했다. 쉬지 않고 그만큼 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너무나 오랜만인 달리기에 몸이 살짝 적응하게만 하자고. 첫 러닝하고 다음날 다리 근육 통증이 느껴졌다. 매일 12000보는 꾸준히 걸어서 그래도 어느 정도 하체는 튼튼하다고 생각했는데 뛰는데 걷는 근육과 달리는데 필요한 근육은 좀 다른가보다.





대회 전 총 5번의 러닝연습을 했다. 대학생 때 서울에서 나이키 10km 달리기를 참여해서 완주한 게 나의 장거리 달리기 최고 기록이었다. 이번 마라톤 대회 때는 당연히 풀코스 완주는 어렵고 15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걸 목표로 했다.






이윽고 대회당. 오후 4시면 그칠 거라는 비는 여전히 내렸다. 이슬비로 바뀌길 기대했건만 오히려 달리는 내내 빗줄기는 얼굴을 때렸다. 달리는 시간이 30분이 넘어가니 온갖 생각이 든다. 내가 생돈내고 뭐 하러 이 고생을 사서 할까. 나는 지금 왜 뛰고 있는 건가. 다리가 점점 무거워진다. 과연 다 뛸 수 있을까...



비가 계속 내렸던 대회 당일



결국 15km를 부상 없이 주해냈다. 딱 15km에 가까워질 때쯤 중간에 물을 주는 텐트와 화장실이 있었다. 더 무리하지 말고 여기까지. 중간 텐트에서 물과 간식을 먹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러닝 앱이 정지가 되지 않고 오류가 날 것 같아 얼른 스크린 샷 캡처를 해뒀다. 역시 해두길 잘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록이 남지 않을 뻔했으니. 달린 거리도 거리지만 내가 1시간 20분을 쉬지 않고 달린 게 더 신기했다.



15km 완주의 기록



대회 후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도 다리가 알이 배겨 지끈거린다. 첫 러닝부터 대회 참가까지 러닝의 기록들을 보며 그날그날 달리는 순간, 그 느낌들을 회상해 본다.






산책과 달리기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걸을 땐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달릴 땐 그렇지 않다. 온갖 잡념이 사라진다. 땅을 딛는 발바닥의 느낌과 거친 호흡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뛰면서 내 심장도 팔딱팔딱 뛰는 걸 느낀다.



그래서 일 것이다. 달릴 때 '내가 살아있다'는 그 기분이 강하고 충만하게 드는 이유가. 심장이 뛰고 몸 전체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몸의 모든 근육들이 합력해서 달리는 동작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바깥의 공기와 내 안의 공기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교환되고 있으니까.



왜 굳이 힘들게 숨을 헐떡이는 고통을 참아내며 달리는가? 이유가 있었다. 산책과 독서와 글쓰기와는 또 다른 몰입의 세계가 달리기 안에 있었다. 걷는 사람에서 달리는 사람으로. 삶의 또 다른 중요한 전환이 내게 일어났다.




달리기를 끝낼 때마다 나는 어마어마한 만족감을 느끼는 데 그건 단지 계획대로 달렸기 때문이 아니다. 달리는 동안에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_ <지지 않는다는 말> 8p,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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