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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갈까

by 김이안


산책을 한다. 최근에 깔린 근처 공원 황톳길, 맨발로 열심히 걸어본다. 영화를 본다. 마음을 관찰하며 기록을 해본다. 책을 읽어본다. 잠을 푹 자본다. 새콤달콤한 딱딱이 복숭아를 깎아 먹는다. 달리기를 한다. 휴가 기간, 업무 생각을 하나도 안 하고 알차게 놀아본다. 감사노트를 쓴다. 갖가지 방법을 써보는데도 무력감의 먹구름이 마음에서 계속 머물러 있다.


어떤 날은 퇴근 후, 잠깐만 본다는 걸 두세 시간 유튜브 영상에 절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디멘터에게 영혼이 빨린 것처럼 의지력을 잃은 나.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면서도 핸드폰을 놓지 않다가 어찌어찌 끄고는 자책과 후회 속에 잠을 청하는 내가 넌덜머리 난다. 죽도록 싫증이 난다.


평소 그럭저럭 해왔던 업무들도, 대체 그동안 어떻게 해왔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어렵다.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증발되어 가는 것 같다. 생기가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 찌는듯한 습도 속에 눅눅해진 것 같으면서 동시에 메말라버릴 대로 메마른 것 같은. 긴 무력감과 깊은 침체감.


과거에 이와 비슷한 증세를 겪은 적이 있었나. 복기를 해본다.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됐건 그 긴 어둠의 시간도 장난처럼 어느샌가 물러가 있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여유와 웃음을 찾고 일상을 살아냈다.


그러니 이 또한 지나가기는 지나갈 터. 나를 위해 냉장고에 한가득 과일을 넣고 간 손길. 누군가 건네줬던 베이커리 상품권. 딸아이가 남긴 작은 쪽지. 내게 마음을 써준 이러한 것들을 하나 둘 헤아리며 구름이 걷힐 때를 기다린다.


몸을 챙기고, 마음의 걱정과 근심을 배출하고, 가만히 있다가도 어떻게든 몸부림치면서 버티다 보면 분명 이 또한 지나갈 것을 안다. 이성복의 시 <그 여름의 끝>처럼,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고, 폭풍에도 악착같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절망은 역시 장난처럼 어느새 피를 뿌리며 흩어 떨어져 있을 것을 상상한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린다. 무기력이 무기력하게 오늘 또 한 발자국 물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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