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속에서 자라는 아이
그도 이 모든 것이 ‘원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까스로 건져 올린 미약한 희망이었다.
빛을 잃은 계절을 지나 마주한 그는, 이번이 마지막 시도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내게 마치 또다시 그날로 돌아가는 듯한 공포를 안겼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면, 그다음엔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할까. 끝나지 않을 듯한 고통에 대한 짧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주삿바늘로 몸을 찔러 가며 기약 없는 작은 희망에 기대어 하루를 버텼겠지만, 그렇게라도 하루가 지나가 주는 것이 고마웠던 우리였다.
약을 끊은 탓에 혹독한 현실 속에서 더 큰 괴로움을 겪었을 그는, 그럼에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살고 싶다는 마음은 그의 진심이었다.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는 생각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깊은 관심도, 애정도 쏟을 시간이 없는 이들에게 매번 설명하기엔 버거운 마음과 결정이었다. 그의 아픔이 곧 자신의 고통이었던 이들은, 그가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바랐다. 나는 아마 지나치게 안으로 굽은 팔이었을 것이고, 다른 쪽으로 굽은 팔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그저 살아만 있어 달라는 굽은 팔이 있는 반면, 제발 설명을 바라는 다른 쪽으로 굽은 팔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나중에서야 깨달은 부분이었다. 우리는 함께 슬퍼했지만, 결국은 그저 팔이 굽은 방향이 달랐던 것뿐이라는 걸.
다른 쪽으로 굽은 팔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너만 자식을 잃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유별을 떨어?”
“아이를 다시 낳겠다는 건, 너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 아니야?”
묻지 않았고, 앞으로도 굳이 물을 일은 없겠지만, 솔직히 묻고 싶다. 자식을 잃은 사람에게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가. 그런 말을 할 자격 있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설령 누군가를 위하고자 한 말이었다 하더라도, 그 말이 상대의 마음에 닿지 못한다면 결국 어긋나 버린 것이다. 또한 어긋난 마음에 그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굽은 방향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상실의 슬픔을, 신이 조금은 어루만져주셨다. 내가 가장 안도했던 것은, 우리에게 다른 대화의 주제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이 가족의 커다란 구멍을, 아주 작은 생명 하나가 천천히 메우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며 밤을 새워 울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눈물이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멈추기도 한다.
이제 그는 네 아이의 엄마다.
소식을 들은 한 지인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셋은 곁에서, 하나는 가슴속에서 자라는구나.”
우리는 여전히 고질적인 삶의 불안과 슬픔 속에 살아가지만, 신이 그를 두 번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 빌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