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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봄 Dec 14. 2020

혹한의 추위를 기다리는 이유

  주말이 지나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예보를 듣고 내심 월요일을 기대했다. 유난히 추위를 타고 수족냉증이 심해 늘 덧옷이며 양말을 챙기고 살지만 몸의 고통은 제쳐두고 영하 10도의 쨍한 한기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겨울이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추운 날을 기다리는 것은 응당 추워야 할 겨울을 몇 해 건너뛰어버린 부작용 같은 것이었을까.       



  5차 교육과정 세대는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뚜렷한 사계절이 한국의 좋은 점이라고 배웠다. 기온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야외 활동과 계절식품을 즐길 수 있어 좋다는 교과서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3, 4학년이었던 나는 내용의 사실 여부를 따져 물을만한 비판 능력이 없었고, 교과서는 사실과 진리만을 담는 것으로 신성불가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봄이면 벚꽃이 피고 새순이 돋아나 만물이 새로이 생명을 얻는 활기를 눈으로 보았고, 여름이면 계곡으로 바다로 뛰어들 수 있어 마냥 좋았다. 시원한 수박과 아이스크림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때이기도 했다. 단풍이 왜 좋은지 모르던 시절에도 빨갛고 노란 나뭇잎이 날리면 예뻤고,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쓸쓸했다. 아이에게 눈 오는 겨울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계절, 붕어빵과 군고구마는 행복한 덤이었다. 그러고 보니 교과서의 설명대로 사계절은 장점이고 축복인 것도 같다.   


   

  위도에 따라 계절과 기후가 달라지는 것을 배워 아는 것과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은 별개다. 날씨와 계절의 변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20대 초반, 샌프란시스코에 머물 때였다. 미서부는 환상적인 날씨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2005년 여름 그곳에서, 날씨만으로 인간이 극도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매일 놀랐다. 1년에 12개월을 이 햇살과 바람 아래 살 수 있다면 불행이라는 단어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물론 샌프란시스코의 날씨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겨울은 흐리고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한국의 초가을과 비슷한 그곳의 날씨는 오래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꽁꽁 얼렸다 땀을 비 오듯 흘리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계절 변화가 장점이라던 교과서에 속은 듯 억울했다.     



  한편, 봄은 건조하고 황사가 심했다. 장마가 시작되면 젖은 신발과 바짓단을 견디며 하루를 보내야 했고 이어지는 여름은 해마다 최고 기온을 갱신하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가을은 너무 짧은데 춥고 무료한 겨울은 또 너무 길었다. 동물들이 털갈이를 하는 동안 우리는 철철이 기온에 맞는 옷과 신발을 꺼내거나 사야 했고, 겨울이 지나면 코트 드라이 값만 해도 적지 않게 나갔다. 여름이면 인견 겨울에는 극세사로 이불도 바꿔주면 좋은데, 바쁘고 귀찮으면 두꺼운 겨울 이불을 늦봄이 되도록 덮기도 하고, 옷장에 반팔과 코트가 함께 걸려 있는 때도 많았다. 뚜렷한 사계절을 끊임없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참 바빴다. 더러 일 년 내도록 기온이 일정하면 좋겠다 싶기도 했다. 단, 봄이나 가을 정도로.        



  그런데 최근 홍콩 살이 몇 년은 계절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홍콩은 한국보다 위도가 10도가량 낮아 적도에 더 가깝기 때문에 한국에 비해 평균기온이 높다.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여름 기온은 35도 안팎이고, 겨울은 15-20도 사이를 오르내려 한국 사람에게는 초가을처럼 느껴진다. 끝을 모르는 여름과 90%가 넘는 습도는 참을 수 있었다. 정작 나를 미치게 만드는 때는 겨울이었는데, 이른 아침 베란다 문을 활짝 여는 순간 코에 와 닿는 끈적하고 미적지근한 공기는 견디기 힘들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코에서부터 가슴 아래로 이어지는 기도의 존재를 느끼게 해 줄 냉기가 그리웠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바다는 매일 같은 박자로 출렁였고, 산도 나무도 언제나 변함없는 초록이었다. 창 밖에 보이는 무엇으로도 계절을 가늠할 수 없었다. 꽃이 피고 매미가 울고 은행 냄새가 길거리에 가득 차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눈송이가 날리는, 계절의 기본 값은 변화라는 것을, 싫든 좋든 그 사이클이 이미 나에게 체화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문득 유리창 밖으로 계절이 오고 또 가는 모습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계획보다 일찍 한국으로 돌아오는 표를 샀다.       

 


  단단히 무장했지만 영하 10도는 추웠다. 잠깐의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적한 아파트 뒷길에 서서 마스크를 내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셔 본다. 홍콩 집의 창문을 열 때마다 콧속으로 들어오던 비릿하고 미지근한 바다 냄새가 씻겨 내려간다. 싱싱한 겨울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가슴께에서 옅어진다. 당분간은 이 혹한의 추위를 기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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