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분간의 극한 대치 속에서 얻은 깨달음
아빠 나도 갈래
아내가 감기에 걸렸다. 감기약이 필요했다. 10시가 넘어선 시간이라 나 혼자 약국에 뛰어 다녀오려고 했다. 그러나...
외투를 가지러 안방에 다녀온 사이 아들은 이미 신발을 다 신은 상태였다. 나보다 더 빨랐다. 신발까지 다 신은 아들의 정성이 갸륵해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첫 번째 고비
아들과 난 손을 꼭 잡고 약국으로 향했다. 기분 좋게 걸었다. 아들도 신이 났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약국을 10m 앞두고 첫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아들이 뽑기 기계를 본 것이다. 두 명의 아저씨들이 장난감 뽑기를 신나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담배 연기였다. 담배 연기가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와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들은 뽑기 기계 곁을 떠나지 못했다.
"아들, 아빠는 담배 냄새가 너무 싫어"라고 말했고, 아들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고비는 비교적 쉽게 넘어갔다.
편의점을 돌아서면 바로 약국이 있는데, 밤 10시가 넘어서인지 약국 문이 닫혀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길 건너에 문을 연 약국이 보였다.
두 번째 고비
이번에도 약국을 10m 앞두고 두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하필이면 '세계과자전문점'이 떡하니 있는 게 아닌가. 건물 밖에 전시된 제품이 하필이면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젤리'들이었다. 아들은 젤리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발이 바닥에 붙어버렸다.
"저거 사자. 아빠 저거 사자". 연신 졸라댔다.
"아들 저번에 아빠랑 마트 가서 사 온 곰돌이 젤리 아직 집에 남아있지? 집에 들어가서 그거 먹자. 많이 줄게"
아들은 눈앞의 젤리를 10초간 쳐다보곤 약국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약국에 도착해 감기약을 사고 나오려는데 아들이 외쳤다.
"아빠 저 비타민 보고만 있었어요"
'아... 비타민이 먹고 싶은데 사달라고는 못 하고 완곡한 표현으로 에둘러 말하는구나...'
기특한 마음도 있었지만, 늘 "비싸", "다음에 사줄게"라고 말하는 아빠라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세 번째 고비
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왔던 길로 가려면 '세계과자전문점'을 다시 지나야 한다. '아들이 이곳을 그냥 지나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반대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신호등이 켜졌다. 뛰어야 했다. 아들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들의 손을 힘을 주어 끌어당겨 빨리 걷도록 했다.
"아빠 천천히 가. 천천히"
아들이 울먹이며 얘기한다. 그런데 지금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어서 빨리 걷지 않으면 신호등 사이에 갇히게 되는 상황이다. 아들의 말을 무시하고 빨리 걸었다. 무사히 건넜다고 생각했을 때 아들의 울음은 터져 나왔다.
"다시 저리로 가. 다시 저리로 가. 빨리 가지 마. 빨리 가지 마." 아들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난감했다. 하지만 빨간 신호등에서 아들의 말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들, 아빠 얘기 좀 들어봐"
"싫어 싫어 아빠 말하지 마. 저리로 다시 가. 저기로 가"
"얘기 좀 들어봐. 뚝! 뚝!"
아들은 좀처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가량을 서로 맞섰다. 난 아들에게 "뚝!" 그치고 "아빠 말을 들어봐"라고 강요했고, 아들은 "아빠 말하지 마. 저기로 다시 가. 빨리 가지 마"라는 말을 무한 반복했다.
주변 가게 아저씨의 중재
아들과 나의 대치를 한참을 지켜보던 주변 가게 아저씨가 우리 주위로 다가왔다. 그는 아들에게는 "'아빠한테 안아주세요'라고 해야지"라고 한 뒤 내게는 "아들 좀 안아주세요. 너무 오래 울게 놔두면 안 좋아요"라고 했다.
아들과 나 사이의 대치를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생각해보니 아들이 30분가량을 계속 울고 있었다. 더는 나올 눈물이 없을 정도로 아들은 울었다.
"아들, '뚝!'하고 이제 아빠 말 좀 들어볼 테야?"
아저씨의 중재 덕택인지 아들도 한풀 꺾였다. 앉아서 눈을 마주 보며 말을 걸었다.
"빨간 신호등이면 건너면 돼 안돼?"
"안돼"
"차들이 다니는데 중간에 서 있으면 돼 안돼?"
"안돼"
"지금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안아줘 안아줘 안아줘" 다시 울음보가 터진 아들은 내게 안아달라며 몸을 계속 들이밀었다.
난 일단 안아줬다. 그리고 다시 말을 건넸다.
"신호등으로 건너는 거야. 여기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켜지면 건너자. 알았지?"
"여기 말고 저기로 가"
"저기는 차도잖아. 거기로 어떻게 가"
"저기 말고 저기 멀리 있는 신호등. 우리가 왔던 신호등"
"아... 거기... 알았어... 가자" 아들을 안고 약국으로 오면서 건넜던 신호등 쪽으로 걸어갔다. 신호등에 도착하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부쩍 커졌다.
"아들 지금 기분 나빠?"
"응"
"아빠한테 왜 기분이 나빠졌는지 얘기해봐. 들어줄게"
"옹알옹알옹알" 아들이 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아빠가 또 뭐라고 혼낼지 겁이 나서인지 말을 아주 조그만 소리로 얘기했다.
"아빠가 혼내지 않고 들을 테니까 편하게 얘기해봐. 아빠가 들을 준비돼 있어"
"옹알옹알옹알"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을 했다.
생각해보니
나 스스로 있었던 일들을 다시 정리해봤다.
"아들 아빠가 빨리 가자고 강제로 끌어당겨서 기분이 나빴어?"
"응"
"무리하게 달려가게 해서 기분이 나빴어?"
"응"
"생각해보니 아빠가 잘못했네. 신호등이 켜졌다고 하더라도 다음번에 건넜으면 됐는데. 괜히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아들은 천천히 걷고 싶었는데 아빠가 아빠 마음대로 아들을 빨리 걸으라고 강요했어."
사실 그랬다. 신호등이 켜졌는데, 내가 있는 위치에서 신호등까지 갔다가 건너려면 뛰어야 했다. 어른인 내게는 금방인 거리였지만, 아들의 기준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난 아들을 배려하지 못했다.
"응"
"기분이 많이 상했어?"
"응"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네. 그래도 신호등이 켜졌을 때는 빨리 걸어야 하는 거야.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면 차들 사이에서 갇혀버릴 수도 있거든"
"......"
"응 그래. 신호등 앞에서 좀 더 기다리지 못한 아빠가 잘못한 것 같네. 신호등을 좀 더 여유롭게 기다렸다면 천천히 걸어도 충분했을 텐데. 아빠가 마음이 급했어. 미안해"
"응"
내가 아들에게 재차 사과하고 나서야 아들은 화가 좀 풀린 듯했다.
아들 뭐해줄까?
집으로 가는 마지막 신호등 앞에 섰다. 아들의 기분을 더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어부바해주면 기분이 좀 좋아지겠어?"
"아니"
"아들 목마 해주면 기분이 좀 좋아지겠어?"
"응.."
아들을 목마를 태웠다. 그제야 웃는다.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아들과 올라오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목에 태우고 이렇게 걷는 날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아들의 몸무게가 점점 늘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잠시 목마를 태웠는데 목이 뻐근해 옴을 느꼈다. 갑자기 마음 한켠이 저림을 느꼈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들, 아빠랑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을 아들이 커서 기억할 수 있을까?"
허공에 대고 물었다. 혹시 먼 미래의 아들이 내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득 담아...